털이 희어졌고 우묵하여졌으면 레위기13:1~3

                    "여호아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데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 같이 되거든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 자손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
                     처가 피부 보다 우묵하여 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구약때 백성들은 문둥병으로 의심되는 환부가 생기면 반드시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날 신앙인들을 두고 바로 "너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 (벧전2:9)"고 하였으므로, 바로 우리가 이웃의 문둥병을 진단해 줄 수있는 자격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때 제사장이 백성들의 문둥병을 진단해 주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제사장이므로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문둥병은 '심각한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상담을  요청해 올떄 이웃의 표정을 보고도 그 사람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이 가져야 할 능력이며 제사장의 수준입니다. 알고 보면 이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또한 기도하여 그 말씀이 생명되어 있다면 누구를 만나든지 대화를 하다보면 그 사람의 수준이라든지 상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주장하는 주의 말씀의 능력으로 분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도 자기의 지식으로 진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둥병을 진단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가운데 살아있다면 제사장으로서 이웃의 문둥병을 충분히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제사장을 찾아가 진단을 받습니까?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 같이 되거든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 자손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려 갈 것이요.(레13:2)"라고 기록한 대로 문둥병으로 의심되는 딱지 ·색점 상태가 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진단을 받게 됩니다.

 딱지나 색점이 생긴 것처럼 우리안에 들어온 죄로 말미암아 밖으로 드러난 모습, 즉 시기하고 정죄하고 미워하는 모습이 나타나면 그것은 문둥병, 즉 심각한 죄로 의심하고 제사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오늘날 우리는 남을 찾아 가기는 힘들지라도 자기 자신이 제사장됨을 안다면, 그러한 증상이 나타날때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레13:3)"라고 한 것처럼 딱지나 색점이 생긴 피부에 두가지 증상, 즉 털이 희어지거나 피부가 우묵해지면 제사장은 문둥병으로 진단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문둥병으로 진단하는 이 두가지 증상의 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문둥병은 먼저 털이 희어지는 증상이 있습니다. 털은 어느 때에 희어집니까? 털이 희어지는 것은 늙으면 생기는 노화현상입니다. 그것은 즉, 병든 상태가 오래되어 피부가 약해져 있는것을 말합니다. 병이 오래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오래된 죄의 생활로 우리의 영혼이 약해진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피부가 우묵해진 것은 무엇일까요? 이 우묵함은 성격적으로 '구덩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51:1에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너희를 떠낸 반석'이라 함은 바로 반석되신 예수께서 우리를 '우묵한 구덩이'에서 파내어 구원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우묵한 구덩이'란 바로 '죄로 가득한 곳'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사망으로 가득한 구덩이, 죄로 물들어 있는 곳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는 것입니다. 원래 '구덩이'란 원어적인 의미는 '죄가 감추어진, 무덤과 같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묵한 구덩이란 '심각한 죄가 감추어져 있는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슥9:11~12)"라고 기록함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의 언약의 피로 물없는 곳, 생명이 없는 곳, 죄로 가득찬 구덩이에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처럼 성경에서는 자주 '물없는 구덩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도 애굽으로 팔리기 전 '물없는 구덩이'에 갇혔고 또한 예레미아도 물없는 구덩이에 던져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또한 아가서에도 물없는 구덩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물이 있는 웅덩이는 우리 영혼의 생명 샘을 말하는 것이라면, 물이 없는 웅덩이는 생명이 없이 사망만 가득찬 곳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성경은 물없는 구덩이에서 죽게 됨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영적인 의미를 담아 기록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물없는 구덩이에서 그를 파냈다함은 '사망이 가득한' '죄가 숨겨진 속'에서 우리를 구원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소제
               되고 수리되었는지라(눅 11:24~25)"

 생명체가 있는 존재는 물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물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더러운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간후 물이 없는 곳을 쉬기 위해 찾아다녔습니다. 귀신은 어떤 존재 입니까? 생명이 없는 자 입니다. 즉,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사망이 가득한 곳, 물이 없는 웅덩이 같은곳을 찾아다녔을 자 인것입니다. 결국 귀신을 쫓아냈던 사람이 다시 죄로 가득한 상태가 되었음을 보고 귀신의 눈으로 볼때 소제가 되고 수리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귀신은 죄가 가득한 더러운 곳이 깨끗한 곳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한 것은 당시 믿지않은 자들에게 하신 말씁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어도 예수를 믿지 않고 다시 죄로 물들어 버리면 귀신이 또 들어온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도 물없는 구덩이란 '죄로 가득한곳'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묵한 곳'이란 사망으로 가득한 곳, 그 사람에게 죄가 숨겨져 있는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털이 희어지고 그 피부가 우묵해졌다 함은 죄가 들어와 오래됨으로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허약해져 있고 또 들어온 죄가 나가지않고 숨겨져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바. 곧 그것은 아주 심각하게 죄로 물든 상태, 문둥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항상 제사장으로 자기 자신을 먼저 관찰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벌써 자기 자신이 얼마나 중한 문둥병에 털이 희어졌고 우묵한 곳에 죄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처럼 제 삼자가 보아도 잘못한 것이 보이는데도 상대를 평가하고 흉을보고 자기 자신만 옳다고 하는 상태는 아주 심각한 문둥병 입니다. 제사장으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인격인 경우 털이 희어지고 피부가 우묵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자가진단 할 수 있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이런 증상을 깨닫고 심각한 상태가 되기전에 치료 받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항상 구하는 내용밖에 없어서 되겠습니까? 제사장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 말씀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by X-friend | 2012/01/27 13:04 | 트랙백 | 덧글(0)

문둥병자 나아만 군대장관 열왕기하 5장1절~3절

성경에서 말하는 문둥병은 죄를 상징하고 있다고 지난번에 언급해 드렸습니다. 우선 문둥병이 발병하는 모습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문둥병은 일반 다른 육체의 병이 발병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예를들면 일반적 피부병은 외부로부터 피부에 균이 감염 될때 감염된 피부에 국한하여 발병한다고 하면 문둥병은 일단 균에 감염되면 몸속으로 부터 시작 됩니다. 그리고 바깥 피부에 옮겨져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병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문둥병의 특징인데 이것은 인생이 죄를 받아 들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죄를 받아들일때 바깥 외부로부터 죄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안에 들어온 죄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고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으므로 자연히 죄인이 되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으므로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죄의 법입니다. 반면에 생명의 성령의 법도 마찬가집니다.성령이 내게 오시므로 내가 거룩하게 살수있는 것을 말합니다. 문둥병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죄를 받아 들이고 죄가 생각을 지배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죄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또한 문둥병은 '죄'를 상징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은 유명한 '나아만 장군'에 관한 말씀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왕하 5:1~)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이 그 병에서 씻음 받는 것도 단순히 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예수로 되어질 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결론적으로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문둥병을 씻는 것은 죄를 씻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찾아간 나아만은 엘리사가 시키는데로 몸을 요단강 물에 일곱번 씻었더니 그 몸이 깨끗이 나았던바, 이것은 죄를 씻는 모습을 말합니다. 요단강물에 일곱번 씻게 하였다는 내용에서도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안식일이요, 구원을 상징 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죄사함을 받았다는 의미를 더욱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믿어 거룩하게 되는 모습을 두고 성경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셨으니...(엡 5:26)" 라고 말하는 것처럼 , 물은 예수의 죽음과 연합하는 믿음으로 죄씻음 받는 것을 의미하며 말씀과 성령 으로 영혼이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요한복음 에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물은 세례의 의미로 예수의 죽음과 연합한 믿음을 가진 자를 성령으로 다시 살린다는 뜻 입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을 물로 씻고 깨끗케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음으로 죄씻음받고 성령의 생명으로 다시살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라고 하신 말씀중 중생의 씻음이란 죄의 몸을 벗는 첫 씻음을 말하며,그 후 성령이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씻는다' 는 의미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서 또한 그 의미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예수님을 향해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요13:8)"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라고 대답하시자 다시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라고 말하죠. 그런데 그때 주께서는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 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미 목욕했다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죄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이제는 다시 죄씻음을 받을 필요는 없으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혼에 묻은 때나 먼지를 발 씻는 것처럼 매일 회개함으로 씻어야 한다는 것이죠. '네 발을 씻으라'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은 죄로 심각하게 물들어 있다는 것이고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다고 판명을 받는 것은 이제 심각한 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당시 문둥병은 참으로 큰 저주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로 모세를 대항한 미디안이 문둥병을 얻었을때 그를 진 밖으로 쫓아 내어 아예 들어올 수도 없게 했던 것을 보아서도 문둥병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 가운데 영적인 문둥병이 든 자가 있다면 그는 교회와 도무지 합해 질수 없는 심각한 상태가 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분들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든가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포용해야 하는데 자기 자신만을 주장하다보니 헐뜯다 못해 본인 스스로 시험에 이기지 못하고 떠납니다.

중직자라도 말씀앞에 회개하고 나가야 하는데 말씀이 없거나 말씀이 있었던 말씀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교회를 떠날수 밖에 없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문둥병으로 진 밖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떠난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진 밖으로 내보내신 것입니다. 그렇찮으면 온 교회에 문둥병을 옮기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진 밖으로 나간 사람과 친교는 해서는 안됩니다. 시험든 자가 말한 불만과 비방한 말을 교회 내로 옮길때 더욱 분란을 일으킬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를 위로하고 설득하여 치료하기 위해서는 신방을 가도 되지만 들은말을 절대로 옮겨서는 안됩니다. 한쪽 이야기만 들었을때 자기 자신도 편견으로 물들수 있기 때문 입니다. 시험든 자를 신방 할때는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문둥병에 걸린 자들은 진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이와같이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혹, 심각한 죄를 의식하고 있다면 문둥병자 처럼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양 태연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 즉, 친한 사람들에게 불만을 표출 할수 밖에 없습니다.

친한 사람에게 문둥병을 옮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 밖에 없습니다. 정말 심각한 문둥병을 볼수 있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즉, 말씀과 성령 충만한 회개 기도로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서 빨리 벗어나 주님이 원하는 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아  멘  -


이어지는 내용

by X-friend | 2012/01/13 01:13 | 트랙백 | 덧글(0)

"낙없는 세상에 낙을 주시려고 (전3:1~25)"

오늘 본문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때가 있다. (전3:1)'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들의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으니라 (전3:2~8)" 

한마디로 우리 인생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노력여하에 관계없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쉽게 예를 들어 태어나고 죽는 일이 우리 뜻대로되던가요? 우리의 모든 범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때가 있는가 하면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 본문 내용을 보면 불행할때가 있으면 행복할 때가 있고 행복할 때가 있으면 불행할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에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 입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좋아도 내가 원한다고 영원히 소유할 수 없으며 머물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행도 역시 영원하게 불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바람잘날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서는 영원한 것이 없기때문입니다. 태어날때가 있으면 죽을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관자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앞날을 알기 원합니다. 그래서 무당에게 점술가에게 철학원을 찾아 헤메는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 앞날을 알고 있다면 자기가 원하는 길만 찾아 갈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에서 행복한 길일까요?
인생이 처음부터 호의호식 하면서 살았다면 행복하여 현실에 고맙게 생각할까요? 행복할줄 모르고 불평을 할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에게는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때를 모르기에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또 수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전3:10)"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종을 알지 못하게 하셨으며 또 시종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헛수고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의 애쓰고 노력함이 헛수고 일 수밖에 없는 그것을 우리로 하게끔 하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또한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결론지어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3:4)"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인생의 헛수고로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알게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과 노력대로 죄의 욕심을 따라 다 이룰수 있다면 스스로를 믿고 죄의 무서움을 모를 것입니다. 죄에서 떠나하나님을 믿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고 별수고도 없는자가 불공평하게 얻을때 인생은 무엇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깨달을 때 '신'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이 같은 신을 찾되 하나님을 찾지 않고 금수와 버러지 형상과 같은 우상으로 바꾸어 그것을 자기를 주관하는 자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도 한번 돌아볼때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마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헛수고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게 하고자 그리하신 하나님의 참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인생은 일의 시종을 모르기에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애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육체의 수고는 피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병들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마디로 사는 동안에는 어차피 육체의 고통을 겪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육제의 고통 가운데서도 즐거운 삶 즉, 낙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심령의 낙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삶이 어차피 헛수고 일진대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육체는 물론 그 심령까지 같이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전도서 2장 24절에 "사람이…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수고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삶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은 마음의 낙을 누리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바 결국 하나님으로만 세상을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로 육신의 수고와 고통을 감수케 하신 하나님께서 또한가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3: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동물과 구별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악보다 선을 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니 솔로몬이 "사람이 사는 동안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3:12)"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선을 행하되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선을 행하는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데 안타깝게도 죄인인 인생은 결코
기쁜 마음으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낙을 누리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기쁨으로 선을 행하게 하신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미 때와 기한을 정하시고 모든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은 인생으로 하여금 시종을 알지 못하고 헛수고를 하게 하셨습니까? 헛수고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이 우리의 주관자가 되심을 알게 하고자 그리하신 것이니 그 분을 믿어 수고뿐인 이 세상에서 심령의 낙을 누리고 기쁨으로 선을 행하는 복된 삶을 사십시요.

 하나님은 낙없는 이 세상에 낙을 주시고자 우리로 헛수고하는 수고를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헛수고는 오히려 참 수고가 될것이니 그때 우리를 사랑하여 그리하신 하나님을 참 사랑을 느끼는 자기 되십시요.

 안되는 일을 만나거든 그 일을 이루려고 일에만 관심갖지 말고 먼저 하나님이나의 주관자이심을 바련하고 그분의 주장을 받아 낙을 누리며 기쁨으로 선을행하는 복된 자, 복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by X-friend | 2011/12/30 10:20 | 트랙백 | 덧글(0)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이는 문둥환자라 부정하니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

확실히 진단 할 것은 그 환처가 그 머리에 있음이니라

문동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래위기 1344~45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그 머리카락에 기름을 발라 아주 단정한 모습을 유지 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단정케 했던 것은 곧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가 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반면에 그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풀어 헤친 것은 곧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문둥병 환자란 그 자체가 죄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죄로 영혼이 통증 없이 썩어가고 있는 모습이 문둥병 환자 입니다. 자신이 자가 증상을 느낄 때는 벌써 흉칙한 몰골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회복이 불가능한 병이 문둥병입니다.

이와 같이 한번 죄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병든 영혼도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회복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이야 한센(문둥병)치료가 가능하지만 그 당시에는 불치병 이였습니다.

 

문둥병자에게 머리를 풀라 하심은 곧 머리가 풀린 상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 따라 산다는 뜻은 자기 머리를 자기가 주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원래 우리는 예수로 거듭났으므로 우리의 머리는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 되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머리를 단정히 하고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단정히 한 것은 머리 되신 예수님의 말씀아래 철저히 순종 하는 모습이며 머리를 풀어 헤친 것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문둥병자들은 죄를 품고 있다는 것인데 어떻게 주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죄를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문둥병자에게 옷을 찢고 머리를 풀라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옷을 찢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수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가리어 주었습니까? 가죽 옷이였습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마리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누굴 예표한 것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인 대신 죽으시므로 우리의 수치와 허물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가시 덤풀과 같은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겠금 가죽옷으로 감싸주신 것입니다.

 

옷이란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고 의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옷을 찢었다는 것은 죄만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신분도 의도 찢겨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 헤칠 뿐만 아니라 또 한가지 윗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게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아랫입술을 가리고 말하면 말은 전해지지만 침이 튀잖아요. 그런데 윗입술을 가리고 말하면 침이 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문둥병자들에게 윗입술을 가리고 말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병을 옮기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문둥병자들에게 윗입술을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라고 말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는 부정한 자니 나와는 말하지 마십시요. 나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요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영적인 문둥병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해서는 안되며 또 다른 사람들도 그들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품고 있는 자. 온전히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라도 대화는 모두 사망의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전염병처럼 전파력이 강합니다. 그들과 대화하는 자들 조차도 그 마음은 어둠에 물들어 있는 자이므로 그들과 대화하는 자들 조차도 물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문둥병자들의 윗입술을 가리고 나는 문둥병자다라고 말하게 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금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부정적인 사람이 얘기할 때 마다  남을 평가하는 사람. 그들과 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부정적면이 있거나 상대를 헐뜯고 있다면 스스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금방 죄에 동조를 하며 신바람 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수다를 떱니다.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가 즐거운 것입니다. 어느 때는 남을 헐뜯고 나면 속이 시원할 때도 있습니다. 믿는 자라도 죄사함은 받았지만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죄에 쉽게 물들어 버립니다. 단 하나님 말씀으로 금방 양심에 가책을 느껴 빨리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마져 느끼지 못한다면 문둥병이 영혼까지 번진 것입니다. 본문은 문둥병을 통해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을 교훈해 주고 있는바 이 같은 말씀을 헤아려 우리 영혼의 모습을 잘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by X-friend | 2011/12/16 14:38 | 트랙백 | 덧글(0)

무당을 살려두지 말며 짐승과 행음하지 말라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짐승과 행음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하지니라 “ (출애굽기 2218~20)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사랑에 하나님 이신걸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불신자들까지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율법의 대강령에도 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왜 무당은 살려두지 말라고 하셨는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무당을 어떤 존재 입니까? 무당은 귀신의 말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 귀신들이 하는 일이란 공포를 조장하여 두려움을 심어주어 두려움의 종이 되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무당은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귀신의 종이 된 자들에게서 돈을 끌어 내는 자들이 무당들이 하는 일입니다. 영적 전쟁은 인간을 누구의 종이 되게 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에서 겁을 주어서 헌금을 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베풀어 사랑에 종이 되게 하여 스스로 은혜 받은 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 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언제 하나님께서 겁을 주어 헌금 하겠끔 하였습니까? 그런 짓은 마귀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종이 된 자들에게 고난이란 처방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두려움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고난 가운데 사랑을 깨달아 감사하지 않습니까? 고난도 두려움의 종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난은 물이 말라 거의 없을 때 꽃이 핀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절박한 상황이 오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군자고궁(君子固窮)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군자는 어렵고 궁핍할 때 더 굳고 심지가 깊어진다고 합니다.

 

오래 전 얘기지만 한번은 병원 전도를 나갔는데 무당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당에게 전도를 하였는데 그 무당 아주머니 얘기가 아주 리얼 하였습니다. 자기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신앙생활 하지 안냐고 하였더니 신앙생활 하고 싶어도 두렵고 무서워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귀신을 모시는 신주단지를 불질러 버리고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집안에 우환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손주가 교통사고가 나든지 몹시 자신이 아프든가 그래서 또 무슨 일이 일어 날까 봐 두려워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아쉬웠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을 조금만 더 인내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귀신들이 항상 하는 일은 두려움을 주어 두려움에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연하게 대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새벽기도 하면서 금식까지 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에게 기도 부탁하기 바쁩니다.

 

새벽기도는 영적 충만을 위해 평상시에 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급함을 보인다는 것은 벌써 두려움에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귀신들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간 것입니다.

 

장자가 고사에서 말하고 있는 계지덕이란 고사성어가 생각이 납니다. 어느왕이 투계를 몹시 좋아하여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던 기성자란 사람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구해 최고의 투계로 만들기 위한 훈련을 맡겼습니다. 맡긴지 한참이 지나서 왕이 기성자에게 물었습니다. 닭이 싸우기에 충분한가 아닙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아직 자신이 최고 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 교만을 떨치지 않는 한 최고의 투계라 할 수 없습니다.

한참이 지나 왕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성자는 네 아직도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도 너무나 쉽게 반응합니다.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진중함이 있어야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한참이 지나 왕이 또 묻자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은 하지 않습니다. 이제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가 되었습니다. 닭의 덕이 완전해 졌기에 어느 닭이라도 그 모습만 봐도 도망 갈 것입니다.

 

목계란 나무로 만든 닭이란 뜻입니다. 나무로 만든 닭처럼 완전히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의 능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이 제일이라는 교만함을 버리고 남의 소리와 위협에 쉽게 반응하지 않으며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눈초리를 버린 나무로 만든 닭처럼 완전한 자아의 성취와 평정심을 이룬 모습을 목계지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공격으로 환란이 올 때 자기 자신의 교만을 버리기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교만을 부립니다. 두려움으로 너무 쉽게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조급함이 공격적인 눈초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경질 적으로 변합니다.

 

평정심을 잃었다는 것은 믿음이 약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종이 되었다는 것은 귀신의 종이 되어 끌려 다니고 마는 것입니다. 상대방 귀신이 온갖 지랄을 하면 나에게 두려움을 주어도 믿음으로 나무로 만든 닭처럼 평온하면 결국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강한 훈련으로 그들의 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강하고 담대한 자로 장성한자로 역사 하시지만 아직도 두려움에 종이 되어 흔들려 버립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포기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안타까움으로 이겨내라!” 하시며 말씀으로 위로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도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고 말씀은 무당 안에 역사하는 악한 영을 없이 하라는 것이지 무당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악한 영을 없이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악한 영과 가까이 하는 모든 일입니다. 즉 제사나 점치는 일, 굿 하는일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택하는 일등등 즉 날짜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따라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 한다는 귀신, 초하루와 이튿날은 동쪽으로, 사흗날과 나흗날은 남쪽, 닷샛날과 엿샛날은 서쪽, 이렛날과 여드렛날은 북쪽에 았고 . 9, 10, 19, 20, 29, 30일은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손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사를 하거나 먼 길을 떠날 때는 손 없는 날과 방향을 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세상의 모든 악한 일 뒤에는 언제나 악한 영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짐승과 행음한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라는 말 역시 무엇을 말합니까? 짐승과 성교합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변태라고 할 것입니다. 짐승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짐승을 적그리스도요, 마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마귀는 이세상 임금입니다. 이세상 안에 있는 모든 종교인 우상까지도 마귀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세상 따라 사는 것은 짐승인 마귀와 행음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짝하여 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배척하라는 얘기가 아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라는 얘기 입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짝하여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어야 분별을 가지고 끊어 버릴 것은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짐승과 행음한 일을 죽이는 일입니다.

 

또 이어서 본문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을 우상에게 드린 자도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 즉 어린양이나 짐승의 제물은 모두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며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물을 우상에게 드렸다면 그것을 무엇은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로 구원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상으로 구원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제하여져야 한다고 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영원히 생명을 우리에게 주어 우리와 하나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기 말라고 말씀하심은 우상을 섬기지도 말며 우상의 지배를 받지도 말며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1서4장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느니라.                                                                  - 아 멘 -



                                                                                   

by X-friend | 2011/12/02 17:58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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