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짓지 않은 집에 사는 책임

⁠신명기 6장10~11절 말씀은 전부 ‘네가 들어가 얻는 땅과 너희가 거기서 누리는 모든 것은 너희가 획득한 것이 아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네 하나님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 이런 모든 것- 배부름, 윤택한 생활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물질적 축복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앙생활을 승리한 자에게 준다는 개념은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우리가 짓지 않은 집, ​우리가 ​심지 않은 실과, ​이런 것들은 전부 12절에 있는 바와 같이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말라" ​하는 것과 대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윤택함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앙을 지키는 자에게 어떻게 물질로 보상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종 되었던 애굽에서 ​갖지 못했던 것, 죄의 종일 ​때에는 ​누릴 수 없었던 것을 부요하게 갖게 된 ​자리에 지금 우리가 있다는 대조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더니 건강하고 돈도 더 생기고, 하는일이 무엇이든지 잘되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짓지 않은 집은 우리로 부터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가진 윤택함, 그러니까 영적인 차원에서의 윤택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짓지 않은 집, 우리가 심지 않은 실과, 영적인 것은 우리로부터 출발한 것이 없습니다. ​"우선 집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가족이 하나가 되는 보금자리가 ​됩니다. ​프라이버시나 ​어떤 ​위험에서 보호받을 수 있고 ​매서운 ​강추위에서 ​또 ​뜨거운 무더위​에서 피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안식처가 ​됩니다. 개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집인 ​것입니다. 집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은 구원받은 우리를 그렇게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막이나 성전은" ​전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예언​ 하고 있듯이 ​집이나 성막이나 성전도 같은 개념으로 ​보셔야 은혜를 더 누릴 수 있습니다.

집이란 비유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재산 가치나 사는 집으로만 보지 마시고 구원받은 자에게 거저 주시는 사랑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신 ​은혜를, 말씀을 꼭 서두에 언급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심지 않은 실과를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적 양식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상 받을 만한 짓을 한데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가나안도 구원받은 자들은 거저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의 존재, 그 인생의 부요함이 제대로 드러나는 자리가 가나안 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사는 곳은 애굽 입니다. 죄와 사망의 자리에 앉아 있는 곳, 거기가 애굽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젖과 꿀이 차단 되는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젖과 꿀은 영적인 것입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가나안은 물질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깊은 영적인 내용을 상징화하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성도들이 기억해야 하는 신명기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짓지 않은 집, 우리가 심지 않은 실과는 내가 내힘으로 이루어낸 결과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른 그의 자녀들에게 처음부터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신분과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육신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이 언제나 ​성경의 경고입니다.

‘너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허락 되어진 것입니다​ 그것, 즉 ‘가나안 자체로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그것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가 짓지 않은 집, 심지 않은 나무, ​그 열매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사는 의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받은 새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뭐가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답게 살게 하려고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길은 오직 하나,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신명기에서 누누히 강조하는 것이 바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물건이 가득한 집,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 네가 심지 아니한 실과, 이 모든 것은 애굽에서 구원한 백성들에게 당연히 얻게 하시는 은혜들인 것입니다. 우리로 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면서 내가 짓지 않은 집에 사는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by X-friend | 2019/10/18 12:00 | 트랙백 | 덧글(0)

복받기 위하여 벌받지 않기 위하여

⁠신명기 1장40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살펴 보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때마다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선택이나 결정의 문제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결정을 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저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못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면서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아닙니다, 우리는 올라가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싸우겠습니다, 하며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44절의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마친지라" ​라는 말씀처럼 아주 묵사발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 통곡했습니다. ​"왼쪽 길로 가서 잘못 되었으니 그러면 내가 이번에는 오른쪽 길로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회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왼쪽 길로 갔다가 벌을 받았으니 오른쪽 길로 가겠다, 오른쪽 길로 갔다가 상을 받았으니 난 계속 오른쪽 길로 가겠다. 이것을 신앙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앙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못된 길을 선택하면 ​어떤 벌을 받는다 ​하는 이유 때문에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고, 잘된 길로 가면 어떻게 ​즉각적인 유익이 있는가로 좋은 길을 가게 하는 방법을 쓰시기도 ​합니다.

이런 것과 같습니다. 어려서 산수 공부를 할 때 2+4를 손가락으로 했던 것처럼 신앙의 첫 훈련을 ‘복받기 위하여, 벌받지 않기 위하여​ 라는 식으로 진행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분명히 결정하게 하고 선택하도록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지우게 된 위기에서 왕에게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고 왕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렬한 풀무불에서 건지실 것이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절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 결정으로 인하여 이해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 편을 들고 하나님 쪽에 서는, 선택과 결정을 하는 사람, ​그런 신앙 인격의 상태를 성경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했다가 거기서 하나님 앞에 혼나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면 혼이 나고 손해를 봐서 번복하고는 그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싸움이지, ​그 선택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주느냐에 ​관한 싸움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내가 선택을 한번 잘해서 들어가고 선택을 한번 잘못해서 못 들어가는 그런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다워야 되는 곳, 한 두번 시험 봐서 합격하고 탈락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관한 싸움이지, 내가 요구하는 이해관계는 ​아닙니다. 주문과 부적 식의 신앙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문과 부적 식의 결과를 얻는 방법으로서의 신앙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신앙이 요구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문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그 대상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주문을 외우면 어떠 어떠한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문입니다. ​"열려라 참깨!" ​가 무슨 뜻이지, 누가 그 주문에 대답을 해서 그 결과를 만들어 주는지는 상관없이 ​"열려라 참깨!" ​라고 하면 40인의 도적의 보물창고 문이 열린다는 것만 압니다. 이런 식의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기도하는 것에서 부터 우리 신앙이 그렇게 동원되어서는 안됩니다. 부적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그부적을 하고 있으면 어던 초월자가 그 부적의 기호에 따라 어떤 약속된 결과를 만들어 주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부적을 하고 있으면 ​물에 빠져도 안 죽는다든지 전쟁에 나가서도 총알이 피해간다든가 ​이런 식의 결과만 압니다.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신앙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방법론으로서의 신앙이라는 것은 뜻밖에도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종교심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신앙을 들먹이는 예가 종종 드러나므로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분명히 점검해 ​두어야겠습니다. 예를들면 사무엘상 4장입니다.

​"사무엘 4장 1~3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워 패하여 사천명가량이나 죽임을 당하자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것이 부적입니다. 언약궤가 오면 하나님도 함께 하실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한 우리가 질리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편 되게 하는 것,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내가 순종하여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언약궤가 사용 ​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습니까?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낸 후 그 보고를 받고 그곳에 못 들어가겠다며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시는가" ​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는 못들어간다​고 노하시자 금방 다시 돌아섰습니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결과를 위하여 하나님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회개했습니다,이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너무 가슴이 찔려서 감동할 틈도 없도 없습니다. 순종과 회개하는 이유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내 편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순종과 회개가 아닙니다.

언약궤를 가져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우매한 짓을 늘 합니다. 기도하고 금식하고 울고 매달리고 회개하면 무조건 된다고 하는 우리의 방법은,​ 똑 같은 실수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지 너무나 분명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소원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는 잔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 일쑤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잔재주부리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 잔재주가 무엇이냐 하면 ​회개라든가, 기도를 한다든가, 헌금을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도 안한 것 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겠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요, 우리가 경외하고 모셔야 되는 분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잘못을 자행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시길 바랍니다.

by X-friend | 2019/10/04 12:00 | 트랙백 | 덧글(0)

구원을 왜 하셨을까요?

⁠출애굽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전제되는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가장 크고 유일한 이유는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우리 모든 성도들이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을 것이라면 구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을 지키는 예식에서 가장 잘 상징되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데 약속의 땅에서 지킵니다. ​유월절을 약속의 땅에서 지킬 때에만, 묻는 자녀들에게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곳에서는 유월절 예식도 불가능할 뿐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딱 한번 지키는데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으로 지킵니다. 구원의 명분이 있었기에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녀들이 ​"이것을 왜 지킵니까?" "옛적에 우리가 애굽에서 종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지킨단다" ​라고 하려면 종 되었던 때보다 적어도 주일성수는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환경도 지금보다 나아야지요. 그래야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 감사하는 것, 자랑하는 것도 왜 이렇게 변화 되었는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능했는가? ​하는 차원에서 ​유월절 의식이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처럼 애굽에서의 생활만도 못한 곳이 광야인데 이곳에서 계속해서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고달프기 짝이 없는 곳이 광야 생활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이 아니고서는 출애굽은 의미가 없고 유월절 의식도 가치를 잃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 얘기를 거듭 하는냐 하면 우리를 가나안에 살게 하려고 애굽에서 꺼내셨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에서 사는 법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이 땅에 사는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이요, 목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한다고요? 그게 가능한 얘기입니까? 내 희생과 헌신이 깔려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자기 자신 하나 챙기기 위해 허덕이며 사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웠지요? 내 문제, 내 자식 문제, 건강 때문에 이용하기 위해 섬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가나안 땅, 즉 성령의 내조하심과 인도하시는 은혜없이는 베드로의 고백을 하실 수 없는 것, 잘 아시잖아요.

가나안 땅에 산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물 없는 곳에 사는 고기었습니다. 애굽에 있다는 것, 죄인이었다는 것은 물 없는데 사는 고기의 형편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 없는 곳에 사는 물고기는 썩은 고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썩은 것을 놓고 자랑을 합니다. 썩어도 ‘준치’ 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선이면 무얼합니까? 썩으면 그만이지요, 세상에서 아무리 지위가 높고 존경 받을만한 일을 했다고 나는 썩어도 준치야, 이러면 영적으로 누가 알아줍니까?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됩니까? 그것을 부러워 하면 같은 썩은 고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속에 사는 살아 있는 고기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번쩍이는 비늘, 힘 있게 헤엄치는 아름다운 모습, ​이런 것들은 물 밖에 나와 죽어 썩어있는 존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물고기를 물고기답게 하기 위해서 재 속에서, 모래 속에서, 물 밖에서 썩고 있는 고기를 살려 물 속에 넣은 것입니다.

이 물고기를 살려내서 아스팔트 위에 그냥 놓아 둔다면 물고기 가지고 장난치는 것 밖에 안됩니다. 물고기를 살려 놓았으면 살 수 있도록 물 속에 넣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원래 물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복 주심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거룩하심 속에서만 제 모습이 나타나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모든 영혼들을 그 생명과 창조의 영광된 목적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당연히 준비햐셔야 하는 환경입니다. 그 곳이 바로 가나안인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자유가 아니듯이 모든 인류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도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 것이 제한이요, 속박이 아니닌것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며 살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사는 것은 ​굴종이거나 속박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나안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말씀따라 사는 것은 속박이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것이 멋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마귀​의 종이 되어 인간이 원치 않는 죄를 따라 살다보니 죄가 익숙하여 그것이 자유인 줄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죄를 따라 사는 것이 불편하여 지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10대들이 한 때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기 시작 합니다. 그들은 ​"나는 누구일까?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10대들은 ​"뭔가 붙들 만한 것, 높은 수준의 삶, 나를 인도해 줄 수 있는 어떤 기준" ​같은 것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어떤 모델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특별히 아버지로부터 이런 것들을 경험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 청소년은 대중문화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기도 하며 ​또래 집단의 유혹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기도 ​합니다. ​칼 막스의 ​아버지는 유대교의 경건주의자 였습니다. 칼 막스도 아버지를 따라 유대교를 믿는 경건한 자녀였습니다. 하지만 칼 막스의 아버지는 ​"루터교로 개종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칼 막스에게 이것은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 그동안 믿던 하나님은 누구일까?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 ​그는 결국 감수성이 예민한 이 시기에 받았던 충격 때문에 결국 대학에 들어가서도 좌파적인 ‘헤겔파​에 소속하면서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공산 혁명을 주도하다가 실패한 다음 런던으로 망명, 영국 대영 박물관 도서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유물사관을 정립하면서 ​"신은 죽었다, 종교는 아편이다" ​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칼 막스는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정신적인 침체 속에 있다가 우울한 죽음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신앙의 가치관 혼돈이 한 자녀 칼 막스의 운명을 바꿨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자녀는 똑 같이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읽고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삶을 읽어 내리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자녀가 쉽게 부모의 신앙을 따라 갈 것입니다.

예를들면 ​부모가 왜곡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시킬 때, 자녀는 부모의 신앙을 동일시하기가 어렵습니다. ​늘 집을 비우고 교회에만 가 있는 어머니, 가정은 돌보지 않고 일과 사역에만 매달려 있는 아버지, 성령 충만해 보이지만 ​자녀들은 이미 부모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돈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앙이 먼저가 아니라 돈이 먼저요, 만물의 척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부모가 무슨 말을 해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정당하게 돈을 벌고 정당하게 쓰고 하나님 안에서 정당한 사회인이 되어 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든 교회안이든 돈이 모든 것이 되고 그 영향을 24시간 동안 늘 받는 것을 보고 살았기에 돈 때문에 죽이고, 속이고, 표변하는 일들을 다반사로 배웁니다.

돈 앞에 굴복하고 돈으로 지지고 볶고 사는 꼴들을 얼마든지 봅니다. ​그것을 남에게서 보는 것은 겁이 안 나는데 부모에게서 목회자들에게서 그 모습을 보면 그 다음에는 가정이든지 교회 안이든지 설득력을 잃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공부 잘 하라고 하면 끝에 가서 이런 말을 하는데 아주 답답합니다. ​"왜 자꾸 공부 잘 하라고 그래요? 결국 공부 잘 하라는 것은 돈 잘 벌라는 얘기 아니예요? 걱정마세요"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잘 벌게요. 인격도 뒷전이고 신앙도 뒷전이고 양심도 뒷전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무언가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출세만 생각합니다. 요세 법무장관 되신 분을 보세요, 말은 멋있어 보이고 훌륭해 보이지요, 그분이 누구에게서 배웠겠어요? 부모와 사회와 정치권입니다.

공부 잘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나안 땅에서, 즉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면 정당한 사회인이 되어 가야 ​하는데 말만 가나안 땅이요, 성령 안이라고 하지만 다른 동네 가나안 비슷한 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신앙인들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고 인도하셨는지 기억하면서 ​하나님 자녀답게, 하나님 성품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양심으로 채우시고 그 양심으로 사실 때, ​자녀들에게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새 신자에게 ​하나님 뜻대로 자르치고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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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friend | 2019/09/20 12:00 | 트랙백 | 덧글(0)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국에 대하여 성경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거든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종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당부를 재삼재사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강조하시는 이유는 거기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는 자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할 때만 복된 결과가 생겨나는 곳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땅에 기근과 홍수가 일어나며, 하늘이 닫히고 외적이 쳐들어 오며 마침내 그 땅에서 쫓겨나리라는 것이 성경에 분명하게 경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순종하면 어떤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어떤 벌을 받는가를 말하면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이 ​‘땅’​ 입니다.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또는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하리라" ​이처럼 땅이 자꾸 등장하는데 이 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같이 진짜로 젖과 꿀이 흐르고, 그 땅에 가면 원적외선이 나와 건강해지고 그 땅에서 살면 모든 것이 잘 되는 식의 기적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통치의 현장으로서의 땅입니다.​ 땅이 자꾸 등장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국가 성립의 3대 조건은 ​국민, 영토, 주권​ 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첫번째 되는 조건은 하나님의 ​통치권 ​입니다. 그리고 그 통치를 받는 ​백성이 있고, ​그 ​통치권이 ​시행되고 ​순종되어 나타나는 ​현장으로 땅이 있습니다. 땅이라는 무대가 성경에서 중요한 문제로 언급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힘든 것은 하나님께 순종 한다고 다른 곳 보다 수확이 잘 되는 땅을 받은 것도 아니요, 순종한다고 땅을 파면 ​희귀한 희토류가 쏟아지는 땅에서 사는 것도 아니요, ​순종한다고 ​앞날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그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백성으로 사는 현장이 바로 땅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이 ​"그런 땅이어야 했듯이 오늘 날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의 삶의 현장, 자기가 몸담고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순종하며 사는 성도들의 ​증거가 나타나는 무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그 땅에서 장수하고 세상사람과 그 인생이 상상할 수 없는 복됨으로 장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지 않고 우리 삶을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 우상을 섬기면서 사는 것에 급급하다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무대에서 속히 내쫓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세상의 복과 장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보니 복을 받고도 감사할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글을 읽으면 신앙생활 안하고 다 도망갈 거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을 세상 복이나 받고 사는 비결의 책이라 생각하는 것부터 바뀌셔야 합니다.

창세기 12장1~3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보냅니다. 이때 무엇과 구별하는가 하면 ​"본토 친척 아비의 집과 구별합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그의 가문을 빛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문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복된 것이나, 증거될 만한 것이나,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나, 남들이 관심을 두어야 할 모든 것이 있다면 이제 그것은 그의 가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문제가 되도록 그가 새롭게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은 자기 가문을 빛내는 자도 아니요, 자기 선조의 음덕을 받아서 형통한 자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문을 빛낸 조상을 자랑하거나 조상의 인맥으로 자기 존재를 과시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자로서 그렇게 살도록 구별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보내기 전에 ​단절시키고 결별시켜야 할 과제였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근원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불러 모으시고 아브라함을 세워 놓고 ​‘짠’​ 하면 누런 금목걸이가 생기고 또 ​‘짠’​ 하면 번쩍번쩍하는 다이야 반지가 생겨서 ​‘봐라’​ 까불지 마라 하는식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복됨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 ​라고 증거하십니다. 주위를 잘 살펴 보세요,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의 건강과 형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헐뜯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입’​조심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삽니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에 와서는 특별히 별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지고 볶고 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이어가는 일상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을 사는데 있어 그 삶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입니다. ​일상사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자로 거룩하게 ​사는 자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며 ​삽니다.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은 다르다" ​를 확인하고 그를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을 보는 자는 복된 자요, 하나님을 믿어봤자 ​‘금’​ 나오고 ​‘은’​ 나오는 것은 아니더라며 아브라함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지 못하는 자는 저주받은 자인 ​것입니다. 아무리 성격상 부정적인 사람일지라도 신도의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는 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격상 별 문제가 없는데도 ​부정적인 면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쉬운 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와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가 생기는 이유인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가진 닭이 ​‘금 달걀’​을 낳고 그가 가진 소에서 ​‘바나나 우유가’​ 나온다면 누가 아브라함을 저주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다른 점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가나안 땅,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에서 ​아파트를 분양받거나 석유가 쏟아지는 땅을 불하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된 인생길을 걸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며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속에 있는 ​인생의 복됨을 보도록 부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땅을 가능한 많이 돌아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파서 병원에 가더라도 그를 보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복된 자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 편안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땅과 연결된 문제들을 논하는 초점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인맥을 만드시는 것은 내 삶이 윤택해 지는 것도 좋고 건강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여러분의 ​지경을 넓히신 것입니다. ​밟고 다니신 땅에 사람들이 있다면 ​축복과 저주를 뿌려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땅에 씨를 뿌려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추수하실 것입니다.​    - 아멘 -   

  

by X-friend | 2019/08/30 12:00 | 트랙백 | 덧글(0)

신앙을 열심히 할 수록 우상에게 하듯이 섬길 수...

신명기4장15절~24의 말씀의 중요한 초점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섬기기 위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16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우상을 만드는 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우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은 ​사람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하여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 앞에 마땅히 엎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이후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자기가 신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만든 종교들을 보십시오.

좋은 의미에서 종교를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조금 부족한 어떤 결함을 메꾸기 위한 소도구에 불과하든가, 아니면 ​힘을 갖고 있지만 인간만 못한 인격과 성품을 가진 자로 묘사되기 ​일쑤입니다.

​인류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는 그리스 신화입니다.​ 그리스의 신들을 보면 인간 보다 나은 것은 능력뿐이고 하는 짓은 모두 인간만 못하지 않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볼께요. ‘유리시즈​가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떤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섬의 여신이 유리시즈를 못 가게 하려고 그에게 온갖 호강을 시켜 줍니다.

유리시즈는 자기를 기다리는 부인과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할 책임과, 편안한 그 섬에서 돌아가지 말까 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그때 그 여신이 지옥에 간 유리시즈의 옛 부하들을 불러냈습니다. 그 부하들이 다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거기서 신이 되십시오. 지옥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 세상에서 종 노릇하는 것만 못합니다. 거기에서 신이 되셔서 이쪽에는 나오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 부하중 하나가 ​"왕이시여, 부인과 백성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어서 돌아가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여신이 그에게 돌아가면 늙어서 죽어 지옥에 갈텐데 그래도 좋으냐고 묻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떤 결정을 하시겠어요? 영원히 살고 늙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아름다운 여신이 아양을 떠는데 말입니다. ‘답​은 각자 생각하세요.

그때 유리시즈가 외치는 말이 ​"나는 돌아가서 내 책임을 다 하고 떳떳이 지옥에 가겠다" ​입니다. 이렇게 ​대비되는 ​것입니다. 그저 능력은 있지만 ​아주 높은 인격이나 고매한 생각 없이 그 능력으로 자기 편하게 사는데 바쁜 신과 ​비록 ​재난이 있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맡은 책임은 외면하지 않는다는 잘난 인간, ​이렇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자구요. 인류 문학의 최고 걸작인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신들은 인간이 갖고 싶은 부귀영화와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들은 능력만 빼고는 인간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에 친근감이 들지만 ​인간의 탐욕을 그 신들에게 갖게 하므로 ​얻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부귀영화입니다.​ 그것을 가지면 그 다음은 ​영생하고 싶은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중국천하를 제패한 ‘진시황제​를 보세요. 어느정도 가지면 그 다음은 영생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을 통하여 만족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신들에게서 얻을 수 없는 것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이 인격까지는 신들에게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격적이나마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이 갖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평가입니다. 인격적으로 항복하고 경배하기 위해 우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무엇을 이루어 주는 대상으로서, 그 우상을 세워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섬기기를 약속하는 것, 이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청계천에 ​잠수함만 들어오게 하시면 ​반을 드리겠다는 식은, 이건 아닙니다.​ 세일즈 하는 식의 신앙도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받으시는 것은 어떤 보상과 대가로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감사를 한다든가, 헌금을 할 때, 그것을 우리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경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이 뜻을 분명히 알아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결정자이시라는 것, ​모든 신앙의 초점은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목표를 내가 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 이것을 두고 두고 배우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훈련하시고 ​어떤 식으로 그 과정을 만드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욥의 고백처럼 ​"내가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이 아시나니 그가 나를 훈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갈이 나오리라" ​는 이 고백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 보다 높으며 하나님은 우리보다 의로우시고 선하시며 자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을 왜 이렇게 하실까?​ 하고 그 당하는 과정에서 ​너무 고달파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그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이유를 저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높으시고, 어떻게 의로우시고, 어떻게 자비하시고, 어떻게 거룩하신지 다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를 향하여 어떤 사랑을 갖고 계시는지 우리를 위하여 어떤 능력을 동원하시는 분인지 알고도 우상을 대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지적을 신명기 말씀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멘 -      ​​ 

by X-friend | 2019/08/16 12:0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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