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일천 번제

 

열왕기상 3장 1절 ~ 15절 말씀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여 산당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솔로몬 꿈에 나타나시어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요구하심이 있습니다.


왕상 3장 4절에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한글개역 성경에는 ‘드렸다’라고

번역함으로써 완료의 의미를 담고 있어 천 마리의 짐승을 한꺼번에 잡아 제단에서 태워

드리는 제사로 오해할 수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기브온 산당에서 정기적으로 제사가 드려지곤 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천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많음’을 의미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번제 하나만 잘 공부하여도 예수님의 깊으신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번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짐승 즉 소, 양 그리고 염소를 잡아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비둘기를 잡아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가 있습니다.


소는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인내로 이기고 순종으로 나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양은 끝까지 온유와 겸손으로 나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이고요 비둘기는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눈물의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생명이 꺼져가기 직전에 구원하시고자 애타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예수님의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구약에는 번제물인 짐승피를 통하여 죄사

함을 받았습니다. 이 내용을 보아 솔로몬 왕은 매일 매일 수없이 죄사함 받았다는 내용이

됩니다.


왕상 3장 3절에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자기 아버지 다윗의 교훈을 잘 지켰다고

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과 동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솔로몬도 하나님

을 사랑했고 아버지 다윗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서 떠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매일 번제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죄를 떠나기 위해 수 없이 번제를 드리는 그런 모습을 아주 예쁘게

보신 것입니다.


왕상 3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은 애굽왕과 조약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하여 다윗성에 두었다

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들과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인간적 이익을 위해

율법을 어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길 바라시지만 그들이 죄를 지어도 그 죄에서 떠나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 번제를 수없이 드리는 애쓰는 모습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집 나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아들을 책망하시기 보다 돌아온 아들을 기뻐 받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어떠한 죄을 지어도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 솔로몬은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는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애쓰는 모습을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무엇이든지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은혜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그의 아들인 저에게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게 하시고 오늘날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종인 저에게 주님께서 선택하신 수많은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백성을 다스릴 수 있도록 옳고 그름을 가려 판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매 그 말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께서 너는 너 자신

을 위해 오래 사는 것이나 부자가 되는 것도 구하지 않았고 네 원수를 죽여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너는 오직 백성을 위해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네가 구한 되로 지혜와 슬기를 주겠고 너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겠다. 너는 부와 영광을 누릴 것이며

네 평생토록 너와 같은 왕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파격적으로 솔로몬을 끔찍이 여긴 줄 아세요?

솔로몬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죄를 멀리 할 뿐만 아니라 죄를 씻기 위해 매일 매일

수없이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변화된 성숙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더 생각하여 지혜를 구한 모습이 하나님을 감동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바라시는 장성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인정받고 복을 받은 솔로몬 왕이 끝말에는 타락하고 맙니다.

그는 이방여인들로 인해 우상숭배에 빠져 변질되고 맙니다. 구약 때 짐승으로 드려지는

번제로는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제물로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히 10장)


예수께서 오시기전에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신(성령)이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어(요 14:26)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내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 안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의 대가를 대신 감당하신 예수의

피의 공로가 성령안에 있으므로 (히 9:14~15) 지금 우리는 죄를 지어도 성령안에 있는

예수의 피에 공로가 그때 그때 죄를 사하여 주시므로 성령께서 떠나실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실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때 마닥 예수의

능력에 보혈로 씻기시고 붙잡아 주시므로 성령을 받은자들는 절대로 타락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고 승천하신 후 예수를 믿어 성령을 받은자들은 얼마나 복된지 모릅니다.

우리는 솔로몬왕 보다 더 복된자들입니다. 항상 감사하고 사십시오.

by X-friend | 2008/11/06 12:19 | 트랙백 | 덧글(0)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십자가에...

 

 창세기 9장 20절 ~ 25절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노아가 벌거벗은 것은 술에 취하여 분별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자기의 수치와 허물을 드러낸 것입니다. 죄를 드러낸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육신은 허물인 죄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함은 아비노아의 벌거벗은 죄의 허물을 보고 나가 두 형제에게 전합니다.

 함은 안타깝게도 형제인 셈과 야벳처럼 옷으로 아비의 허물인 죄를 덮어준 것이

 아니라 아비의 허물을 퍼트린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퍼트린 것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허물은 죄를 보지 않기 위해 옷을 갖고 뒤걸음쳐 들어가서

 옷으로 덮어주었고 나올때도 아비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기 위하여 얼굴을

 돌이키고 나옵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죄는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하지 않습니까.

 (마5:27~28 엡5:3) 더 성숙한 모습은 남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본문 하반절에 가나안의 아비 함이 죄를 지었는데

 그 아들 가나안이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내용을 보아서는 가나안은 아무죄도 짓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 12절에서 이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담 한사람이 범죄하므로 그 후손들이 정죄에 이룬 것을 강조하기 위해 죄지은

 함보다는 그 자식이 저주에 놓인 것을 부각시킨 것을 메시지화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 한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모든 후손이 사망에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망에 놓은 백성를 구원하시고자 개입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에스겔18:2~4까지 잘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추려 보면 너희 이스라엘이 속담에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였는데 나 여호와가 맹세하노니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헤아려보면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다는 것은 아비의 죄로 그 아들이

 이가 시다는 것입니다. 아들까지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출20:5, 34:7 신5:9에 아비가 우상을 섬기고 악을 범하면 그 자녀 삼 사대까지

 죄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면(에스겔17:22~24) 범죄하는 그 영혼만 죽는다는 것입니다.

 각자 헤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에스겔 18:20~21)에도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

 하리니(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의 범죄로 저주를 받아 목이 뿌러져 죽었음)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고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악인이

 죄에서 돌이켜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각 사람이 각자 행한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죄에서 돌이켜

 율법을 지키면 죽지 아니하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롬3:10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다 저주 아래 놓였다고 하고 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롬8:3에서는 살 길이 있다고 합니다.

 율법은 본래 ‘의’를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였으나 인간의 육신으로는

 율법의 요구(의)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의인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의인된 것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서 의인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의 부활하시므로 그와 함께 의에

 대하여 ‘산’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출20:5에 아비의 죄로 그 자녀들이 삼 사대까지만 죄의

 대가를 치룬다는 ‘기한’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에 대하여 기한을 두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저주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메시아가 오시면

 끝난다는 것을 삼 사대라는 기한 안에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천이란 숫자는 끝이 없는 영원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크신 사랑을 간직하며 사는 나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by X-friend | 2008/10/22 16:10 | 트랙백 | 덧글(0)

노아의 벌거벗은 것으로 그 후손이...

노아의 벌거벗은 것으로 그 후손이...


창세기 9장 20~25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 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아비의 벌거벗음을 한번 보므로 그 후손들이 저주를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너무

가혹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 3:7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몸이 벗은 것을 알고 몸을 무화과 나무로 가립니다. 왜? 가립니까? 자기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창2:25에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즉 뱀이 유혹하기 전까지는 벗은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는데 범죄한 후 이 두 사람은 부끄럽게 여긴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가리고 싶어 합니다. 지금도 인간은 죄를 지으면 가리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므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되었지만(창3:22) 죄의 근원인 마귀의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께는 불순종한 자가 되었고 그들은 마귀의 종이 된 것입니다.


롬6:16에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순종함을 받는자의 종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말을 들으면 마귀의 종인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 의에 종으로 이르는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으로 인간 안에 죄와 선이 싸우는 갈등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롬7:21에서는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는데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롬7:15~19)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따라 하나님의 때에 선악과를 먹었으면 선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데 죄의 근원인 마귀의 유혹에 빠져 마귀의 말을 들으므로 마귀의 종,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속에 있는 선이 죄를 이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죄의 종이 선을 따라 살 수 있겠습니까? 종은 하기 싫어도 주인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롬7:23에는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지체(육신)속에 다른 법(죄의 법)이 내 마음(영)의 법과 싸워 내 지체(육신)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잡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안에 죄의 법과 선한 법이 존재하는데 육신 속에 거하는 죄의 법이 우리 영에 있는 선한 법과 싸워 죄 속에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갈5:19~21절에서는 더 확실하게 육체의 일에 대하여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육체가 하는 일은 이런 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죄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롬7:25절 이하에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법을 섬긴다고 합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원합니다. 그것은 죄가 부끄러운 일이요, 수치스러운 일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육신은 죄를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종이기 때문에 주인인 죄의 법을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 벌거벗은 육신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죄인의 모습을 가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화과 잎으로는 아담과 하와의 죄와 허물을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마리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죄인의 수치와 허물을 가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의의 옷을 입혀 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마리 짐승이 죽듯이 의로우신 하나님이 죽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성육신으로 오시어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의의 옷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가리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 노아의 손자 이야기는 다음으로 -

by X-friend | 2008/10/10 01:24 | 트랙백 | 덧글(0)

율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율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구약을(율법) 정확히 알면 성경 전체가 보이며 실상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창 3장 22절 “ 여호와 하나님의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 할까 하노라”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집약시킨 말씀입니다.


율법이란 선악을 알게 하는 법입니다. 창세기의 선악과도 같은 뜻입니다.


선악과도 선과 악을 먹는 과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사하거나 죄 값을 치를 때 짐승이 피 흘림으로 나타내면 생명을 줄 때는 먹는 과일이나 곡식으로 표현 합니다.


사람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계 13장 1절~18절 짐승의 수는 666)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여 죄를 따라 사는 것을 짐승이라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아야 선이 좋은지 악이 나쁜지 비교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말씀을 어기고 죄의 근원인 마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입니다. (롬 5:19 참조)

 

롬 6:16에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말씀처럼 죄의 근원인 마귀의 말을 들으므로 마귀의 종,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해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백성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여 율법아래 살게 하고자 주셨던 것입니다. 백성을 사망인 죄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율법하면 경직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혼난다, 벌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그렇게 기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율법의 참뜻을 모르고 보기 때문에 율법이 진정으로 하고 자 하는 일을 놓치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면 하라는 법보다 하지 말라는 법이 더 많고 축복 보다는 저주가 더 많이 가록되어 있습니다.


위험한 지역에 경고문을 보셨습니까? 경고문에 좋은 말로 쓴 경우는 없습니다. 독극물 주의는 해골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위험한 절벽이 있는 데 경고문에 ‘한번 떨어져 보실래요? 죽는지 사는지?’ 그러면 그 경고문을 본 사람이 “우리 심심한데 한번 떨어져 볼까? 절벽아래 바위가 혹이 나는 지 내 머리에 혹이 나는지” 하면서 떨어진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경고문을 써 가지고 누가 위험하다고 느끼겠습니까?


율법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율법은 우리를 지켜주는 법입니다. 보호하는 보호법이지요. 율법을 벗어나는 것은 죄악에 빠지는 것이요, 죄악은 사망이요, 사망은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저주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망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겁을 주어 보호하고자 하는 큰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경고문을 무시하고 안전장치를 넘어가므로 온 인류는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킬 때는 율법이 보호를 하지만 율법을 지킬 수 없을 때는 죄 아래 놓이게 되고 죄의 삶은 사망인 것입니다. (롬 6:23)


하나님께서 죄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리인 것을 아시고 율법으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여 구원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는 법을 두셨던 것입니다. 구약(율법) 전체가 예수님을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안에는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비밀은 신비로움과 초월의 놀라움이 있는 것입니다.

비밀이란, 감추기 위한 의미보다 눅 11:9 ~ 13 절에 구하는 자, 찾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되라는 적극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에 상징적이나 비유로 설명한 이유가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그 비밀이 무엇인지 그 비밀은 이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이며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이 할 수 없기에 신비롭다고 하며 초월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렵고 엄한 율법 안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아 두셨던 것입니다.

그 메시지 속에는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에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생명실과(창3:22) 예수님을 기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가짜 생명실과가 너무 많기 때문에 (불교, 이슬람교 등등) 구약 전체가 예수님을 상세히 기록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에 예수님을 빼면 상식을 벗어나며 이해 할 수 없는 종교가 됩니다.

항상 보면 가짜가 더 먹음직하고 때깔이 좋아 보이듯이 상식적이나, 도덕적이나 논리적이나 가치로 볼 때 진짜보다 더 좋아 보이며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성격은 정확히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였으며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행하였을 경우에 바로 죽여 버릴 정도로 아주 엄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섞이면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생명실과이신 예수님을 정확이 믿고 영접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것을 먹어서는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선적이요, 배타적이요, 또 편협적이라고 합니다.


지금 피가 모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수혈을 하여야 하는데 인삼, 녹용이 좋다 하여 섞어 수혈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제물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신비로움과 초월은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무엇을 먹어야 살아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설명서입니다.


신약에서 역사하신 예수님을 믿어 다시 살아나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복음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① 율법은 백성을 보호하는 법이다.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

    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② 율법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법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

    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③ 율법은 예수님을 설명하는 설명서이며 예수께로 인도하는 법입니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의가(예수)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

    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④ 복음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예수님입니다.

   (롬 6:7~8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롬 7:4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

    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by X-friend | 2008/09/26 00:57 | 트랙백 | 덧글(0)

우리의 모습 그대로 드려도 될까요?(번제와 번제단)

신명기27:5~6 이하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들이 조심스럽게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5절과 6절에 단 곧 돌 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이 말씀 중에 중요한 부분이 돌 단입니다.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고’라는 말씀을 많은 분들이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하는데 얼듯 듣기에는 솔직한 것 같지만 우리의 모습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렸다 가는 구약 때에는 바로 죽습니다.

우리 대신 번제로 드려진 예수님의 공로에 의지하여 드려질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단(번제단) 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기준이 됩니다. 선과악의 기준이 되며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되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