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안식일날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이유"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율법문제로 인해 많은 시비를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으로 인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시비를 받았고, 음식을 먹을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것으로 인해 시비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요한복음 9 장에는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요9:16) 고 말하는 것 처럼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부인하였을 정도였던 것 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 믿음의 기준은 율법을 지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였고 그렇게 신앙의 척도인 율법도 지키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로서 온 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17절을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하심으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율법이 불완전하여 완전케 하기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이해로부터 알아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율법을 주신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허물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3장20절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들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다면 예수님께 달려 왔을 것 입니다. 율법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죄인인 것을 깨닫기는 커녕 자신들의 열성과 믿음과 의지로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것 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들을 의로운 존재로 여겼던 것 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인에게 죄의댓가로 생명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것 입니다. 율법을 완전케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인들의 죄의 댓가로 십자가에서 피흘려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완전케의 의미 즉, 율법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시겠다는 것 입니다. 율법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소중히 여기고 잘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율법이 오히려 무너지고 잘못 오해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렇다면 결국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되는 것 입니다"

 즉, 안식일 규례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고 안하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안식일날 일하지 말라 라는 말씀에 무엇이 생각 납니까? 유대인들이 안식일날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켰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이 안식일날 일하지 않는 것을 알고 안식일을 택하여 쳐들어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쳐 죽이고 가축을 빼앗아 가도 유대인들은 계란무게이상 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기를 가지고 싸우지 못했습니다. 싸우기는 커녕 백보이상 걷지도 못하기 때문에 백보이상 도망 가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적들이 안식일에 쳐들어올 때 놀러오듯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마따디아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시딤과 그들을 지지하는 자 들이 안식일에 적들로 부터 몰살 당하는 일이 없게 하자 하여 안식일에도 싸울 것을 준비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안식일에 마음놓고 쳐들어오는 적들을 매복하고 있다가 전멸을 시킨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안식일에 싸우다 죽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범한 자들이 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안식일을 어겨서도 우리가 기도 많이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만들어 낸 것 입니다.

 천주교에 영옥설이 여기에 근거를 두고 생긴 것 입니다. 지금도 천주교는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도 선행을 많이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를 많이하면 다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본주의에서 나온 교리 입니다.

 계명에 담겨진 메시지를 잘 몰라서 일어난 오해들 입니다. 다시한번 안식일날 일하지 말라 라는 말씀에 생각나는 규절이 있습니다. 에스겔서44:17~18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레위사람 제사장들은 성소 안에서 하나님께 수종들 때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을 것 이니 가는 베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 베 바지를 입고 땀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이 말씀을 보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제사의 제도 중에서 그들이 입는 옷과 그들의 띠는 땀나는 것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세마포는 가느다란 실로 직조가 되어 있어 아주 시원한 옷 입니다. 그래서 가는 베옷을 입고 들어와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땀이 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땀, 그러면 생각나는 것은 아담에게 준 벌이 생각납니다.

 네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3:17) 땀이 난다는 것은 자기의 수고로 자기의 결과를 얻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한 일에 관한 형상들 입니다. 제사는 구원에 관한 일 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관한 일에 땀을 내서는 안된다,라고 하십니다.

 즉, 구원은 우리의 노력의 댓가가 아니며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애써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선물 입니다.

 성경 마12:8에 예수님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떤 분 입니까? 영생이요, 구원자이십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 아시겠지요? 맞습니다.

 안식일은 영생과 구원을 상징하는 날 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상징하는 안식일 날에 일하지 못하게 한 것 입니다.

 영생과 구원은 일하고 땀 흘려서 수고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안식일날 일하지 못하게 하신 것 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은 간곳없고 형식만 지키고 있는 것 입니다. 이들은 형식주의가된 것 입니다. 율법에서 얘기한 안식일에 주인이 오셨는데도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공격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도 형식주의가 되어 내 형제를 책망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면 나 자신 부터 살펴 보아야 합니다. 형식은 형식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하지만 내용인 정신은 없고 형식만 지키고 있다면 가장 무서운 병인 것 입니다.

by X-friend | 2012/05/18 12:00 | 트랙백 | 덧글(0)

보리와 밀은 우리의 영혼에 양식

신명기 8장7절~10절에 진솔된 내용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골짜기에서든지 산지에서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산 하면 모세가 율법을 받던 시내산과 엘리야가 주야로 달려갔던 호렙산이 생각이 납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하나님을 산에서 만날수 있었습니다. 산은 높은 신앙을 상징 합니다. 거기다 모든 물 줄기가 산에서 샘으로 부터 시작하여 시냇가를 형성하여 강을 이룹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산 기도를 즐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산은 상징적인 것 이지 산에가야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어느곳에 든지 계시기 때문에 항상 만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셨고 그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먹을 식물이 결핍함이 없고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는 것 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영적식물이 풍성하게 있는데 이 식물을 먹는자 마다 어떤 환난과 고난이 와도 이길수 있다는 것 입니다. 많은 열매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보리와 밀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밀과 보리의 특성을 보면 이렇습니다.

 밀과 보리는 한겨울의 추위와 눈 속에서도 잘 자랍니다. 땅이 마르고 땅속에 공기가 많을수록 뿌리를 땅속깊이 뻗으며 뿌리털을 많이 만듭니다. 또 밀과 보리의 뿌리는 추울수록 잘 자라서 땅 속 2미터 깊이 까지 뻗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진 눈 보라에 태풍이 와도 견딜수 있는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이 이 식물을 먹는 자 들은 어떤 모진 환난이 닥쳐도 더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린다는 것 입니다. 이런 희한한 식물이 있다는 것 입니다.

 초실절은 보리한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인데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상징하는 절기 입니다. 그 다음 절기는 칠 안식일을 일곱번 지난후 49일 다음날 50일 제 드리는 절기로 오순절 이라고 합니다. 이 절기는 밀을 드리는 절기로 성령강림을 예표하는 절기 입니다. 그래서 보리와 밀은 같은 맥과 인것처럼 예수님과 성령은 같은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장 1절 이하에 예수께서 태초에 영이신 말씀으로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상징하는 보리와 성령을 상징하는 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는 것 입니다. 복음을 듣고 보는 것 입니다. 이것이 영적양식인 것 입니다. 영혼에 양식을 먹는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먹는 영적식물은 결핍함이 없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것 입니다. 거기다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것이라는 것 입니다. 철과 동은 어디다 사용합니까? "신명기33장25절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것이니 네 사는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여기 ‘문빗장’ 에 해당하는(히) ‘미느알’ ‘단단히 잠그다’ 혹은 ‘꼭 닫다’ 란 뜻을 가진 동사 입니다. ‘나알’ 에서 파생된 말로서 ‘요새’‘성채’ 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 입니다. 철과 놋으로 지은 요새처럼 튼튼하고 안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데 누가 빼앗아가며 훔쳐가겠습니까? 요새와 같이 단단할 철로 녹이슬지 않는 동으로 만든 문 빗장 처럼 지켜주신 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보화중 가장 귀한 것은 ‘히브리서11장1절~3절에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 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 들의 증거니"

 우리는 바라는 것 들의 실상이라고 하니까 내가 물질적인 것을 주실것을 믿기만 하면 다 응답 받는다고 생각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물질적인 것 들과는 사뭇 다른 것 입니다. 말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 입니다. 이세상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말씀인 것 입니다. 끝없는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인 것 입니다. 세상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 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말씀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 들의 실상인 것 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인간을 변화 시켰다는것, 회복과 회생 시켰다는것, 대단한 것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참 복인 것 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말씀따라 봉사하는 것도 상급이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일 안한다고 야단친 적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치셨지요.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요. 듣는것 만큼 믿음이 생길 것 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 들의 실상 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양식이 됩니다.

by X-friend | 2012/05/04 12:00 | 트랙백 | 덧글(0)

강 깊이는 우리의 신앙

하나님의 염원은 출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빨리 들어갈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에서 헤맬수가 있든가, 아니면 광야에서 일생을 마칠수 있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 생각 하세요? 물론 가나안 땅에 계실 것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시간이 갈수록 벗어나기 힘든 곳 입니다. 애굽 이상으로 급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가나안 땅은 성령과 동행하는 신앙의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부인하면 구원을 이룰수 없다고 합니다. 성령안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룬 은혜가 담겨져 있기도 하지만 성령안에 있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도움 없이는 즉, 성령의 도움 없이는 말씀을 들어도 깨달을 수 없고 기쁨을 느낄 수 없읍니다. 말씀 따라 살 수도 없읍니다.

 거기다 베드로 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도 신앙고백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세계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구원과 성화를 하나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성령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 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적과의 싸움은 얼만큼 성령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 됩니다. 영적 싸움은 누구의 말을 많이 듣느냐의 싸움 입니다. 우리는 세상 소리를 더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죄를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세상 방법이 지배하는 부분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봐야 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 달라고 기도 해야 겠지요.

 에스겔 47장1절~5절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을 재 보는데 아주 중요한 내용 입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 편 제단 남 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꺽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 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물이 창일 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에스겔 47장1절~2절을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옵니다. 이 말씀은 이렇습니다. "요한복음2장19절~2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1절에 예수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자신을 성전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께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이 물이 생수라는 것을 에스겔47장7절이하에 보면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고 모든 생물이 살고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었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풍성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찌꺼기는 소성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물은 성전인즉, 예수께로 부터 흘러 나오는데 생수가 흘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7장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장1절 예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생수인 것입니다"

 에스겔47장1절~5절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기 진솔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신앙의 깊이를 재어보고 계신다는 내용 입니다.

 놋 같은 이가 (에스겔40장3절) 줄자를 가지고 동쪽으로 가서 500미터 쯤 잰 뒤에 나를 이끌어 발목까지 차 오르는 그 물을 건너게 했습니다. 물이 발목에 찼을때 물의 저항을 별로 받지 않습니다. 뛰어 다닐수도 있습니다. 물의 저항 보다는 자기 의지대로 행동 하는데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생수인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따라 살기 보다는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 입니다. 겨우 주일 성소를 지키기 급급한 상태의 수준으로 보아야 겠습니다.

 다시 500미터쯤 거리를 잰 뒤에 나를 이끌어 물을 건너게 했는데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습니다. 발목에 찬 물보다는 더 물의 저항을 받습니다 그만큼 물이 발목에 차 있을때 보다 몸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발목에 찬 물 보다는 물에 영향을 더 받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더 받다보니 공식 예배에 빠지고 봉사하지 못하는것에 부담스러워 하기 시작하는 수준일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은혜도 받기 시작하고 전도도 하기 시작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부족하여 시험에 쉽게 들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허리까지 물이 차 올랐습니다. 쉽게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수 없을때 입니다. 자기 의지 반, 하나님 말씀에 반 정도 영향을 받기 때문 입니다. 반 정도는 세상에 영향을 받다보니 은혜를 받으면 물질적으로 헌금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물질로 해결하기 때문 입니다. 모든일에 앞장서서 봉사도 하게 됩니다. 물질적 헌금이라고 해서 다 세상적으로 헌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는 많은 부분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시 그가 500미터쯤 되는 거리를 쟀는데 이번에는 그 물이 걸어서는 건널수 없고 헤엄을 쳐야만 건널수 있는 강이 되었습니다. 이때는 물의 힘에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따라 사는 수준 입니다. 신앙의 완숙한 단계로 넘어 갑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도들이 봉사 할수 있겠끔 뒤에서 조용히 봉사하는 수준이 됩니다. 나실인이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듯이 중직자로써 자기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나타납니다. 교회당 안에서 보다 세상에서 더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에겐 빛이 없습니다. 성령충만할때 생수의 강이 넘칠때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소금은 강렬한 태양 빛이 있어야 만들어 지듯이 하나님의 빛으로 인하여 소금이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소금이 없이는 사람이 살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심판주이신 예수께서 지금도 생수인 말씀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에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시험을 보듯이 강을 건너게 하실 것입니다. 환경으로 훈련하실 것입니다. 언젠가는 넘어야 할 강입니다. 세상소리 보다 말씀을 더 들으십시요. 그래서 강을 건너십시요. 승리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by X-friend | 2012/04/20 12:00 | 트랙백 | 덧글(0)

미가와 한국교회

미가 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거한지라, 이에 미가 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사사기17장12,13절

17장에는 이런 사건이 나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는데 미가의 어머니가 은 일천 일백을 가지고 있다가 잃어 버렸습니다. 누가 가져 갔느냐 하면 사실은 미가 그 아들이 훔쳐간 것입니다. 어머니가 잃어 버리고 저주를 했습니다.

 "이 은을 훔쳐간 놈은 손이 콱 썩어라!" 했는데 미가 가 훔쳐 갔다가 겁을 먹고 나중에 자수를 합니다.
 "어머니 사실은 제가 훔쳐 갔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기뻐서, "네가 이렇게 해서 내가 참 기쁘다. 우리 아들 솔직하고 착하구나" 지금이나 그때나 자식에 대한 잘못된 사랑은 여전 합니다. 그 당시 자식 교육 수준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이걸 하나님께 바친 셈치고 너에게 다시 돌려 주겠다. 그리고 이 기쁜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은 이백을 특별히 뽑아서 그걸로 우상과 드라빔(드라빔이란 가정수호신의 통칭)을 만들어 가지고 그것으로 제단을 만듭니다. 에봇(에봇이란 제사장들이 제사할 때 입는 특별한 복장)도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집에다 신당을 차려 놓고 자기네들 끼리 말하자면 이름을 붙이기는 ‘하나님’ 입니다. 여호와 라고도 하고, 그렇게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데 17장7절에 보시면,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 하였더라.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햄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 가 이것 저것 묻다가 보니까 레위 사람이라고 하니까, "잘 되었소. 당신 우리 신당에서 제사장 노릇 하시요, 당신은 레위인 아닙니까?"

 그래서 제사장이 되기로 합니다. 일년에 연봉을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따로 음식을 주기로 합니다. 음식과 사택을 주기로 하고 자식을 낳으면 교육비를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은 열이 연봉이 되니까 지금 우리 식으로 하면 상당히 굉장한 돈인 것 같습니다.최소한 8백만원쯤 되지 않나 생각 합니다.

 18장에 이렇게 진술 되었습니다. 단 지파가 그때까지 자기네가 살 땅을 얻지 못해서 자기네가 거할 땅을 찾기 위해서 여기 저기에 정탐꾼을 보냈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서 얻은 땅이 아니라 제비뽑아서 얻은 땅입니다. 제비뽑아 얻은 땅은 사실은 싸우러 들어가면 이기게 되어 있는 그런 싸움 입니다. 그런데 아모리족에게 내몰려 기업으로 받은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기 위해 정탐꾼을 보낸 것입니다. 거할 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탐꾼이 미가의 집에 들어와서 이 레위의 소년 제사장을 만납니다. 미가 가 이래 저래해서 여기에 왔다고 전부 얘기 해 줍니다. ‘우리가 지금 땅을 정탐하러 왔는데 앞길을 좀 가르쳐 달라’ 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을거라’ 고 축복 합니다. 18장7절에 보시면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없이 거하더라"

 그리고 거기는 무기도 쎄지 않고 라이스 족속이 약하게 보입니다. 돌아가서 단 지파를 이끌고 와서 우선 미가의 집에 들러서 레위 제사장과 신상을 빼앗아 갑니다.라이스 족속을 쳐서 거기를 자기네 땅으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배해 주신 땅이 아닙니다. 이 신상과 레위 족속을 빼앗아 가는 것 때문에 미가 가 나중에 알고 쫓아와서,

 "왜 내 제사장과 내 신상을 빼앗아 가느냐고"고 항의를 합니다. 단 지파가 대꾸합니다. "우리가 지금 몇 명이고 너희는 지금 몇 명이지? 네 손에는 뭐가 있고 우리 손엔 뭐가 있지?괜히 우리를 성질나게 해서 너희가 죽을 필요가 있느냐? 좋은 말 할때 가라!" 그래서 겁먹은 미가 가 그냥 돌아 갑니다.

 이게 지금 17장,18장에 있는 미가 사건인데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 를 가장 대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섭게 생각하는 것은 이게 어쩌면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하고 똑 같은지 모릅니다. 17장에서 18장에 걸쳐서 나온 이, 미가 사건이야말로 종교 놀이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발 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미가와 레위 소년은 말하자면 잘 먹고 잘 살기를 탐하는 한 장로와 한 목사 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씀 드리면 이 사람들은 교회를 하나님을 위해 짓고 있는게 아니라, 자기의 사회적 지위와 자기 만족을 위해서 교회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형교회로 변질 되고 있습니다. 헌금이 몇 십억씩 아니면 몇 백억씩 돌아가다보니 교회 주위에 땅이나 건물을 모조리 사들입니다.

 그 돈으로 선교와 구제에 사용 한다면 마음이 다치고 영혼이 상한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땅 좋아 하는 것은 졸부들이나 할 짓 입니다. 분당의 J 교회는 신도가 만명이나 되고 6억원의 연봉을 받는 담임 목사의 방만한 재정운영등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최근 목사가 사임서를 재출 했다고 합니다.

 서울 서남권 최대 교회 중 하나인 목동J 교회 목사는 32억6000만원의 교회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제작년 11월말 서울 남부지검에 의해 불구속 기소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장로들이 목사를 검찰에 고발하고 목사는 장로들을 교회에서 쫓아 냈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세상 사는방법에 익숙하게 물들어 있는 성도 들이 무얼 배우겠어요? 요새 목사들은 조건만 조금만 좋아도 하루아침에 다른 교회로 떠나 갑니다. 그것 뿐인가요? 교회에서 학비까지 주면서 공부까지 시켜주었는데, 좋은 조건만 제시되면 하루아침에 떠나 갑니다. 목회는 대인 관계인데 대인 관계를 무시하니 직업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 일각의 풍경 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어깨를 토닥 거려야 할 교회가 오히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서글픈 환경 입니다. 기독교의 영적 힘은 간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말을 잘 음미 하셔야 합니다. 영적 주인이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러니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호 처럼 된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신앙생활들을 하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령안에서가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자기 성질대로 세상방법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에 살지 못하고 아모리 족속에 쫓기여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상방법으로 살아가는 라이스에 기업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세상방법으로 기업을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5절~8절에 단 지파는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인을 맞지 못한것 같이 이렇게 세상처럼 신앙생활을 하는데 하나님 나라에 기업이 있겠습니까?

 "기업을 얻기위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안에서 믿음생활을 하려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은 얻었지만, 수준은 미달이기 때문 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의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선행과 충성과 온유와 절재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by X-friend | 2012/04/06 12:00 | 트랙백 | 덧글(0)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신앙생활 하소서!

우선 이렇게 출발 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애굽을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부르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출애굽기3장2절~8절)

 모세를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어떤 사건에서 모세를 등장시키느냐 하면 세번의 구분을 해서 모세를 등장 시킵니다. 40년 동안의 바로의 궁에서의 생활, 40년 동안의 광야생활, 마지막 40년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생활 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80세에 부르시는데 40년 동안의 바로궁의 생활을 끝내고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목자 생활을 끝내고 나서야 부르시는데 부르시는 장면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나타나시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엘리야에게는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만, 모세에게는 가시떨기 나무에 불꽃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이미 모세에게는 가장 큰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나타나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모세에게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지금 이 사건으로 부터 꼭 40년 전에 그가 자기가 가진 신앙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주먹을 쥐고 일어났던 날이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못살게 구는 애굽 관원을 때려 죽였던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의 대답으로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불이 좀 이상합니다. 나무가 타지 않습니다. 보통 불이란 연소할 재료가 있어야 불꽃이 유지되는 법입니다. 지금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은 불 자체가 혼자 타고 있습니다. 이걸로 이미 답입니다. 모세가 못 알아보고 있을뿐 입니다.

 "모세야 너는 사십년 전에  원래는 이렇게 탔어야 할 불을 너를 태워서 불꽃을 일으켰던 날이 있었으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일은 아니니라. 너는 너를 불태우자 24시간 만에 홀랑 타고 남은 것이 재 밖에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커녕 사십년 동안에 바람에 불려 날려다닐 수 밖에 없었느니라" 이 지적을 하러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지적을 위해서 광야의 사십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꽃을 태워 주시지 않는한 24시간 밖에 타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스스로를 불 태워서 사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몽땅 자기를 태워서 보통 신자들은 3년을 탑니다. 3년이 지나고 나면 교회의 뒷좌석에 가서 헌금이나 빨리 내고 도망가는 신자로 전락하든가 아니면 담임목사에게 공격을 합니다.우리담임 목사님은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만 관심을 갖고 없는 사람은 쳐다 보지도 않는다고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헌금하고 봉사, 전도 하였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이 없다는 것으로 불평을 표현 합니다.

 "새벽 기도하러 갔더니 장로들은 하나도 없더라" 는 식의 불평을 합니다. 자기는 숯댕이가 되어 있는데 적어도 장로들은 재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끄실리기만 했으니 열 받을만 합니다. 기도에 매어달리는 사람은 그래서‘내가 뭐가 나아졌는가?’ 늘 명심해야 합니다. 모두가 자기를 태웠기 때문 입니다. 자기를 불태웠기 때문에 알아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간곳없고 재 밖에 없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하나님의 불이 붙어있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재료로 자기의 열심과 열정을 근거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뛰어 다녀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재고가 바닥이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힘이 나는 것이 아니라 피곤해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는 문제에 들어가면 왜 어려워지느냐 하면 자신을 태워야 되는 방법 밖에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 집니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밖에 땔감이 없습니다. 더 달릴수 있는 것은 돈에 위력 입니다. 하지만 먹고 살만하면 병이 납니다. 재 밖에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출애굽이라고 하면 언제나 성급하게 애굽을 탈출하는 것, 바로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부터 자유를 누리며 홍해를 건너 구원 받았다고 생각 하지만 그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확실히 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문제를 출애굽 사건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3장8절을 보십시오."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을 가겠다"고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가겠다고 합니다.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애굽에서 꺼낼수 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빨리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광야에서는 유월절을 지킬수 없기 때문 입니다. 유월절이 무엇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 처럼 죽어 주시므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므로 사망의 저주가 넘어간 것입니다. 사망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고기를 다 먹어야 합니다. 무슨 뜻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기쁨으로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은 예수를 예표 합니다. 양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양고기는 내장까지 남김없이 먹어야 합니다. 이해가 부족해도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이라도 먹으라는 것입니다.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변화되면 변화되야 기쁨으로 신앙생활 할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태우지 않고 하나님의 불로 태우면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때 세상이 감당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40년 동안 한번 밖에 유월절을 지킬수 밖에 없었습니다. (민수기9장1절~5절) 출애굽한 다음 해에 유일하게 광야에서 지켰습니다. 그것도 애굽에서 갖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39년을 못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태우면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겠습니까?

 유월절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 무엇이 었습니까? 양뿐만 아니라 무교병이 필요 했습니다. 떡은 곡식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광야 생할에서 언제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합니까? 그 땅은 씨뿌릴 땅도 아니고 정착해서 살지도 않았습니다. 곡식이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스스로 장작을 놓고 불을 지피자 하루 타고 모땅 재가 되어서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바람에 불려 돌아 다녔습니다. 모세에게 왜 하필 하나님이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까?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을때, 그때 갖고 있었던 감격을 혹시 울궈 먹고 계시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기생라합 같은 이방사람들을 부쳐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자 할때 여호수아가 파견한 정탐꾼을 숨겨주어 화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기생라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함락할때 그의 일가족까지 구원 받았습니다. 이런 복 받을 이들이 도움을 줄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 유월절을 지키십시오. 말씀으로 은혜받아 성령의 불로 신앙생활 하세요. 하나님의 불로 태우세요. 쓸데없이 밤낮 가나안에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홍해옆에 텐트치고 자기를 태우지 마세요.

 

by X-friend | 2012/03/23 12:0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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