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복을 받을 자인가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설명하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한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이제 더 분명해집니다. 하박국은 유다의 멸망기에 선지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의 유다는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에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박국이 가슴이 아파서 하나님 앞에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선민들이 이렇게 부패할 수 있습니까? 이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의인들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답하셨습니까?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 심판을 내리겠다 갈대아인을 일으켜 바벨론을 일으켜 이 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혹을 때려다가 혹을 붙인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기도하며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그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다 너희끼리 구별한 것에 불과하다"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정상화 시킨다. 내가 심판할 것이다" 다시 묻지요 "아니 그러면 우리까지 몽땅 이방인들의 손에 이렇게 죽이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걱정마라 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심판 아래 묶으셔서 아무도 도망갈 수 없게 품으셨습니다. 심판하여 버려두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진노 중에서도 묶으시는 하나님의 간섭이 모든 인류로 하여금 도망 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진노의 묶으심이 이제 그들 모두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드시는 승리의 묶으심으로 발전됩니다. 걱정마라, 나는 하나님이니라,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역사에 구체적으로 성취 됩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복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을 어디에서 주셨습니까?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차의 권리를 빼앗고 사기를 쳐서 축복을 받아낸 뒤 형의 미움을 사서 도망가는 자리에서 주셨습니다.


하나도 자랑스러울 것이 없고 하나도 복 받을 이유가 없는 자리, 야반도주하여 노숙하던 자리에 하나님이 오신 것이죠 거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다."


내가 누운 땅을 내가 너한테 준다. 동서남북으로, 네 눈 끝 간 데까지 다 준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요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이것은 야곱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복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보세요 야곱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주시기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엄청난 복을 가지고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고 안심하고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패한 날, 우리가 아슬아슬해 하는 날에는 하나님도 내 편을 들어줄지 말지 고민 하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고 영원한 나라와 약속의 자리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한 의지로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누리십시오 순종하고 충성하고 복된 삶을 사십시오 긴가민가하고 구경만 하지 마시고 들어오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인생은 놀라워질 것입니다.



 앞으로의 말씀은 네이버 블로그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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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friend | 2022/01/20 22:37 | 트랙백 | 덧글(0)

전도자를 보냈기 때문에 우리가 듣고 믿을 수 있다는것

롬 1:2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서 미리 약속 하신 것이라"라는 구절 또한 복음이 우리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로 증거된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우리의 진심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방법인 것입니다. 복음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행복하고 복 받고 병낫는 일 처럼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죽음을 반전 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란 물론 하나님과의 만남이지만 이 만남은 높으신 하나님이 낮은 인간을 만나 주시는 한 번의 사건 같이 수직적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는 긴 세월에 거쳐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해와 증거는 역사적인 것입니다. 험적이라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대표적 예로 회개를 생각해 봅니다. 회개는 어느 날 한 순간의 어떤 극적인 돌아섬 입니다.


깨달음이 있고 감동이 있고 결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나서 많이 당황스러운 점은 변한것이 아무것도 없다는데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말입니다. 회개하기 전의 날들과 회개한 어제, 그리고 일어나서 다시 맞이한 오늘이 다를게 하나도 없습니다.


회개는 했지만 삶의 현실, 그 배경과 환경과 조건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진심을 담아 기도할 때 조금씩 조금씩 변화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형식상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기도했다면 그 사람은 교만하게 변화 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기록입니다. 구약이 온통 역사서이고 신약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역사를 기록한 것이고, 계시록 역시 역사의 끝을 예언한 책입니다.


서신서는 역사의 흐름을 내용으로 하지는 않지만, 역사 속에 실존했던 교회, 곧 역사의 한복판에 있던 자들에게 보낸 편지이지 어떤 이상이나 도, 감동과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신앙을 얼버무리는 자들에게 쓴 편지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역사 속에서 나타내셨으며 지금도 시간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말해 주는 책입니다.


롬 10:9~12의 본문을 잘못 읽으면 "맞아. 믿어야해. 시인해야 해"와 같은 한 순간의 각오로 강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깨달음, 결단이라는 무 시간적 각오가 신앙의 중심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신앙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전도자를 보냈기 때문에 우리가 듣고 믿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약속을 세우고 지키시는이가 당신의 사자를 만들어 보냈고, 사자로 부름받은 이가 이 약속을 우리에게 들려 주어서 우리가 믿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신앙의 씨름은 말로 때우거나, 각오하고 진심을 가지면 다 되는 싸움이 아닙니다. 만들고 증명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매일 벌어집니다. 우리가 속한 시간과 공간, 곧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가를 매일의 도전으로 대면하는 것이 삶입니다. 이 삶에서 내가 믿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의 결정 속에서 현실로 구체화 할 수 있는지 하루마다 도전 받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앞으로의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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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friend | 2022/01/06 17:20 | 트랙백 | 덧글(0)

죽음의 자리까지 다 품어 내신 것이 성육신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주인으로 고백합니다. 구약에 근거한 유태교 전통에서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데 왜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길까요? 쉽게 말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왜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바뀌었을까요

예수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 설명이 구체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설명의 구체성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알 수 있게, 볼 수 있게, 이해 할 수 있게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의와 하나님의 내어주심, 내어주기 위해 내려오심이 예수에게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체적 통치와 은혜의 내려오심에 대해 내가 믿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려오심과 찾아오신 예수를 우리는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 설명과 자기 자랑은 모두 우리를 품는데 있습니다. 우리중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의 품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육신입니다.

예수는 오셔서 33년을 살다 가십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이웃과 정치와 사회, 개인의 개성 속에 묶입니다. 인간이 지닌 억울함의 자리에 묶이십니다. 예수는 공생의 속에서 이 세상이 만들 수 없는 초월적 힘을, 권능자의 권력과 지위와 그 영광을 문득문득 나타내시지만, 이런 권능을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이나 제한을 면제 받기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다.

배신당하고 오해받고 욕설과 수치와 고난 속에서 죽으십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자리, 배신의 자리까지 다 품어 내신 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이 성육신에는 죽으심이 있고 배신당함이 있고 억울한 짐을 지심이 있고 수치와 고난 받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품고 오심에는 성육신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용서가 있고 죄사함이 있고 다시 살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육신의 은혜를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와야 합니까? 여러분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어려움의 형편을 보고 "너 그래 봤자 소용없다. 네가 견뎌야 해 그러기 위해 기도했다"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나는 네 고난을 알아, 너 정말 힘들겠다"라는 말을 해 주셔야 합니다.

이런 말이 제일 고맙습니다. 누가 내 고난을 알아주기만해도 내가 얼마나 가슴 아픈지를 이해해 주기만 해도 단지 들어주기만 해도 우리는 아픔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일도 성육신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해결 해 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구체적으로 품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억울한 짐을 지셨다.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다, 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그 못난 자리까지 내려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자초한 채찍에 맞는 자리까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그 비난의 자리까지 내려 오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입은 자로서 여러분을 만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 반가워하게 하십시오. 여러분과 만나는 것이 기쁨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상대가 여러분이 품고 있는 생명을 나누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후부터는 네이버 블로그로 통합하여 뵙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방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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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friend | 2021/12/24 00:49 | 트랙백 | 덧글(0)

넉넉함으로 베풀게 되는 삶

사실 예수를 믿는 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넉넉함이어야 합니다. 집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더러워진 옷을 빨아줄 것이요, 고픈 배를 채워줄 것이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실토하면 부모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이 처럼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스스로 채우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입니다. 그러니 대강 살아도 되겠다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식을 징계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았습니까? 징계 하지 않으면 자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십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철이 들었는가, 아닌가를 물어야 합니다. 세상은 경기 하듯이 경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경기에서 이겨야 하고 모든 순간에 우위에 서야 한다고 믿는 바람에 명분이나 명예나 지위나 권력이나 우월함 같은 데에 붙잡혀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구원이 무엇이고 그 안에 있는 부요함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번 우리의 현실을 원하는 소원대로 조종하려 하고 조작하려 하고 장악하려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변화 시킵니다. 이런 배경에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이해하고 기다려주며 될 때까지 정성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사랑하라고 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겁먹지 마라, 정죄하고 다니지 마라, 인상쓰고 다니지 마라, 네가 넉넉하고 가진 자 인줄 알아라. 이것이 바로 '사랑하라'는 말에 담긴 뜻입니다.


사랑은 불타는것이 아니라 넉넉해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 패배 속에서도 명예가 있을 것입니다. 경기에서 진 팀이 이긴 팀에 대하여 찬사의 박수를 보내는 것처럼 멋진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겼어도 바보같이 구는 사람들을 종종보게 됩니다. 승리했다고 패자를 조소하거나 경멸하고 만다면 그 사람은 승리가 가지는 명예를 감당할 실력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설령 그런 상대에게 졌다고 해서 통곡하고 유니폼을 찢어 버리는 것으로 패배의 끝을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일 이긴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멋진 패배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 여러분이 직면하는 조건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누리는 넉넉한 성숙과 영광과 명예가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패배 할 수 없는 인생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한 순간도 필요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서 모든 시간과 모든 경우에서 승리하는 여러분의 삶이요,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by X-friend | 2021/12/10 02:32 | 트랙백 | 덧글(0)

산 제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산 제물'이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산 제물이 아닙니다. 너희의 살아가는 삶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통치를 아는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죄의 뿌리가 아직 뽑히지 않은 채 신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마귀가 위협하고 유혹하는 이 세상의 현실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지만 만사형통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 속에서가 아니라 아직도 자기가 주인인 것 같이 굴며 우리를 속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삶인지, 우리에게 준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영화<타이타닉>에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배가 침몰할 때 구명정이 모자라서 남자들은 거의 타지 못합니다. 이제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잘 차려입은 네 사람의 연주자들이 나와 찬송가<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를 현악 사중주로 멋있게 연주했습니다.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을 때까지 말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다. 그냥 멋있기만 한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것도 예수 안에서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낼 수 있는 멋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부러 그런 자리에 찾아가서 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사망의 그늘이 늘 습격해 옵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이 빛과 생명으로 살아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으며 또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증명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멋진 삶입니다.

삶은 멋지고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죄에게 넘겨주지 않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거나 혹 넘어지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습니까? 그것을 안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멋진 신자입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동화처럼만 살 수 있겠습니까?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았더라, 이렇게는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현실이 그것보다 깊은 도전을 던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도전이 클수록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영광도 크며 증거도 커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사망의 그늘이 늘 습격해 오며 도전을 해오는 속에서 빛과 생명으로 살고자 애쓰는 여러분에게 드릴 위로는 이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남자 아이를 기를때 이런 말을 자주하게 됩니다 "사내자식이 이러면 돼?"이 말은 꾸중하는것이 아닙니다. 자존심을 가지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면 돼?"라는 말은 꾸짖자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의 명예를 가지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을 확인시켜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나오는가 보십시오 명예롭게 살아가는 것을 보시게됩니다.

by X-friend | 2021/11/25 21:39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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