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열심히 할 수록 우상에게 하듯이 섬길 수...

신명기4장15절~24의 말씀의 중요한 초점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섬기기 위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16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우상을 만드는 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우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은 ​사람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하여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 앞에 마땅히 엎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이후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자기가 신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만든 종교들을 보십시오.

좋은 의미에서 종교를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조금 부족한 어떤 결함을 메꾸기 위한 소도구에 불과하든가, 아니면 ​힘을 갖고 있지만 인간만 못한 인격과 성품을 가진 자로 묘사되기 ​일쑤입니다.

​인류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는 그리스 신화입니다.​ 그리스의 신들을 보면 인간 보다 나은 것은 능력뿐이고 하는 짓은 모두 인간만 못하지 않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볼께요. ‘유리시즈​가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떤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섬의 여신이 유리시즈를 못 가게 하려고 그에게 온갖 호강을 시켜 줍니다.

유리시즈는 자기를 기다리는 부인과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할 책임과, 편안한 그 섬에서 돌아가지 말까 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그때 그 여신이 지옥에 간 유리시즈의 옛 부하들을 불러냈습니다. 그 부하들이 다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거기서 신이 되십시오. 지옥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 세상에서 종 노릇하는 것만 못합니다. 거기에서 신이 되셔서 이쪽에는 나오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 부하중 하나가 ​"왕이시여, 부인과 백성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어서 돌아가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여신이 그에게 돌아가면 늙어서 죽어 지옥에 갈텐데 그래도 좋으냐고 묻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떤 결정을 하시겠어요? 영원히 살고 늙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아름다운 여신이 아양을 떠는데 말입니다. ‘답​은 각자 생각하세요.

그때 유리시즈가 외치는 말이 ​"나는 돌아가서 내 책임을 다 하고 떳떳이 지옥에 가겠다" ​입니다. 이렇게 ​대비되는 ​것입니다. 그저 능력은 있지만 ​아주 높은 인격이나 고매한 생각 없이 그 능력으로 자기 편하게 사는데 바쁜 신과 ​비록 ​재난이 있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맡은 책임은 외면하지 않는다는 잘난 인간, ​이렇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자구요. 인류 문학의 최고 걸작인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신들은 인간이 갖고 싶은 부귀영화와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들은 능력만 빼고는 인간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에 친근감이 들지만 ​인간의 탐욕을 그 신들에게 갖게 하므로 ​얻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부귀영화입니다.​ 그것을 가지면 그 다음은 ​영생하고 싶은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중국천하를 제패한 ‘진시황제​를 보세요. 어느정도 가지면 그 다음은 영생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을 통하여 만족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신들에게서 얻을 수 없는 것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이 인격까지는 신들에게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격적이나마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이 갖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평가입니다. 인격적으로 항복하고 경배하기 위해 우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무엇을 이루어 주는 대상으로서, 그 우상을 세워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섬기기를 약속하는 것, 이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청계천에 ​잠수함만 들어오게 하시면 ​반을 드리겠다는 식은, 이건 아닙니다.​ 세일즈 하는 식의 신앙도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받으시는 것은 어떤 보상과 대가로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감사를 한다든가, 헌금을 할 때, 그것을 우리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경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이 뜻을 분명히 알아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결정자이시라는 것, ​모든 신앙의 초점은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목표를 내가 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 이것을 두고 두고 배우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훈련하시고 ​어떤 식으로 그 과정을 만드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욥의 고백처럼 ​"내가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이 아시나니 그가 나를 훈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갈이 나오리라" ​는 이 고백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 보다 높으며 하나님은 우리보다 의로우시고 선하시며 자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을 왜 이렇게 하실까?​ 하고 그 당하는 과정에서 ​너무 고달파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그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이유를 저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높으시고, 어떻게 의로우시고, 어떻게 자비하시고, 어떻게 거룩하신지 다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를 향하여 어떤 사랑을 갖고 계시는지 우리를 위하여 어떤 능력을 동원하시는 분인지 알고도 우상을 대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지적을 신명기 말씀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멘 -      ​​ 

by X-friend | 2019/08/16 12:00 | 트랙백 | 덧글(0)

율법 앞에 사사와 재판관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는 날까지 떨쳐버리지 못할 우리의 죄악된 성품의 흔적인 그 뿌리로 인해 모두가 씨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마음에 안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같지 않은 것, 다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고 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욕하고 꾸중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고쳐지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참느냐가 본인의 신앙 실력입니다.

거짓말을 안하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악한 말을 내지 않는 것, 이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속도 깨끗해야지..." ​아니예요, 속에서는 욕이 나오지만 그 말을 안하고 그런 표정을 안 짓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신앙은 훈련하고 억제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에서 부터 아예 그런 생각이 안 나오는 방법과 믿음의 지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은 신선 같이 사는줄 알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폭행’​ 같은 사건이 자주 생기는 것입니다. ​그 분들도 자기 속에 있는 음욕을 억제하지 못하게 하는 원주민들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이 아닙니다. 주님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을 몰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성도가 자기안에 있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싸움을 해야 되는 성도가 겪는 현실인 것입니다. ​내 안에 그 적이 없기를 바라지만 마시고 그 적을 쫓아 내십시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이 적들을 다 몰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몰아 내셔야 하고 몰아 내는 싸움을 쉬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디에 적용해야 되느냐고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원주민을 쫓아내야할 때, 그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큰 가치요, 목적입니다.

우리의 성경 번역 중에 오해하기 좋게 되어 있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본서의 히브리 제목은 ​‘소페팀’​입니다. ​‘지도자들’ ‘재판관들’​이란 뜻인데 중국어 성경을 번역하다 보니 ​‘사사로’ 기록한 것입니다. 고대 주나라에서 ​‘형벌’​을 관장하던 관리를 일컫는 ​‘사사’​(士師)라는 용어를 본서에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읽으면재판관이라기 보다는 모두 야전군 사령관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을 보호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악으로부터, 어떤 시험으로부터 그 백성을 보호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칼과 창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보호하는 ​자입니다. 잘못한 자에게 벌을 주어 잘못하지 않게 하고, 잘못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잘못이 들어왔다 한들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령들이 시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전쟁할 사람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판사들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모두가 고루 혜택을 입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신명기 1장15절~16절에 그 두령들은 다 재판장들 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송사를 정당하고 공평하게 판결하라고 합니다. 17절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 즉, 너희는 재판함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재판의 기준은 율법이므로 재판을 한다는 것과 판사가 있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법이 지켜진다, ​악과 흉포함이 힘을 못쓰는 곳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누구를 잡고 틀리면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호 장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재판은 내가 옳습니까? 쟤가 옳습니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1~3절을 보세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재판관에 대한 이미지가 무엇인지 보세요. ​억울한 문제를 풀어 주는 ​자입니다. ​힘으로 누구를 압제하거나 손해입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보는 줄 아세요. 불의한 재판관도 밤낮 괴롭게 하면 들어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밤낮 부르짖으면 응답하시지 않겠느냐 입니다. 그래서 밤낮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내만족, 내목적을 얻어내기 위해 이 구절을 이용했다는 것에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사사기에 나온 사사들의 역할이 그런 것처럼, 이 비유에 나타난 재판관의 역할 역시 ​누가 옳고 틀렸느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신원하는 ​자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최후의 심판도 이런 식의 시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계6장9절~10절)

심판이란 무엇입니까? 재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재판은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힘이요, 방법입니다. ​시기가 역사의 끝에 가 있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하나니께서 베푸시는 이 심판, 성도들이 기다려 마지않던 것은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된 보상을 받고 억울함을 다 풀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못했던 자들과 핍박하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몽땅 없이 하시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공포와 신비의 분위기로 가면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은 기쁜 날이기 ​때문입니다. 자다말고 뛰어나가 만세 부르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하고 완전하게 그 영광과 복된 자리에 견고케 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우리를 해하고 괴롭혔던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심판은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들 안 죽으려고 하고 오래 살려고 보약을 먹는 겁니까?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게 아프지 않고 살려는 것으로 이해하기로 하겠습니다.                                  - 아멘 - ​ ​⁠⁠⁠ 

by X-friend | 2019/08/02 12:00 | 트랙백 | 덧글(0)

신명기에 말씀하시길...

신명기는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받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의 ​신앙적 자세와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의 세밀하심에 놀라게 됩니다. 우리 모두를 ​복받는 자리에 오도록 경고하시고 꾸짖으시고 격려하시는 그 사랑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실패하는 자나 화를 입는 자 없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복 주심에 서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는 것이 바로 이 신명기의 자랑입니다.

신명기는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모세가 하는 마지막 유언입니다. (신명기1:1~5)⁠⁠ 그 땅에 들어가 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안에서의 복된 삶을 영위토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율법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명기로 들어가면서 우선 분명하게 확인해야 할 두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들어가서 놀고 즐기는 땅이 아니라 싸우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원주민을 몰아내는 싸움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주님 안에 들어 갑니다.

구약식으로 얘기해서, 상징화된 이 사건을 내용적으로 생각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 풀려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 갑니다. 그런데 ​다시는 사망도 없고, 해하는 것도 없고,눈물도 없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을 몰아내는 싸움을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 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의 지위와 신분이 바뀝니다만, ​그 옛 성품,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싸움은 성화라는 과정으로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외적과의 싸움은 언제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애굽에서의 열가지 재앙에서 부터 광야의 여정속에서 만나는 모든 외적은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말렉과의 전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말렉은 항상 뒤에서 공격을 했습니다. ​앞쪽은 장성하고 건장한 젊은 사람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반면 뒤쪽은 연약한 어린아이와 노인 여자들이 주로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보면 큰일들은 잘 이겨내고 있지만 ​"아킬레스한" ​것이나 ​"트라우마" ​같은 약한 부분을 아말렉이 공격하기 때문에 생각지 않게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다 알고 있지만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보충 설명을 합니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로써 발 뒤꿈치를 제외하고는 불사신으로써 아주 강하나 발 뒤꿈치가 약해 전쟁 때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발 뒤꿈치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트라우마" ​도 상처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입니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심한 감정적 동요를 겪는 ​병입니다.

이 아말렉과 전투도 여호수아가 사령관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나갔지만 그 전쟁의 승패는 뒤에 앉아 있었던 ​모세가 손을 드느냐 내리느냐로 좌우 되었던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옛성품을 벗어 버리는 싸움도 ​하나님께 얼마나 의지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나는 것입니다. ​구약 전쟁을 보세요. 내 힘으로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나안 땅에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인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있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고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믿음에 어떤 결격 사유가 있어서 성도들의 현실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은혜를 받으면 우리 안에서 죄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의 공격과 시험이 더 오지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적들의 공격도 뜸해질 것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공격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우리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4장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엡4:21~24)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은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 였다가 신자가 되는 것은 과정이 없습니다. 순간입니다. 중간 상태가 없습니다. 불신자든지 신자든지 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된 이후에 신자가 그 신자다움에 있어서 승리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매일 매일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이 싸움의 결과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성도다울 때가 있는가 하면 성도답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문제 이후에, ​성도답게 살기 위해 무엇을 하라고 요구 합니까? ​기도 열심히 해라, 봉사 열심히 해라가 아닙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4:25~27)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엡4:29) 이런 것들이 훈련의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악한 생각과 더러운 생각이 안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늘 나옵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저지하느냐가 ​우리들의 신앙실력입니다. 바로 영빨입니다.    ​ 

by X-friend | 2019/07/19 12:00 | 트랙백 | 덧글(0)

베데스다와 양문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5장1~9에 베데스 못가에서 ​일어난 38년 된 병자의 사건은, 38년 동안이나 고칠 수 없었던 병을 예수님께서 하신 단 한마디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으로 고쳤다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물론 ​사건 자체가 38년이나 된 병자를 고쳤다는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메시지는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는 풍성한 비유들이 숨겨져 있음을 여러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름이 여럿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다고 나오고 거기엔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성경에 나오는 명칭들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예루살렘은 조선시대의 한양과 같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조선은 그 성곽에 따라 각기 4대문, 4소문을 두었고 시구문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시체가 나가는 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곽에도 본문, 샘문, 어문(생선이 들어오는 문) 등의 문들이 있었는데 ​양문은 제사드릴 제사용 양들이 들어오는 문이었습니다. ​그 양문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들어서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바로 ​그 양문 곁에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원래 구약성경이 기록 된 언어인 히브리 말로서 ​‘베이트’​ 와 ​‘헤세드’​ 즉, 집과 은혜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단어의 뜻도 참 재미있습니다. ​‘베이트’​와 ​‘레헴’​의 합성어인데 ​‘레헴’​은 ​‘떡’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입니다. ​"내가 하늘로써 내려온 산 떡이니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연결해 볼 때 이것은 어떤 상징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와같이 ​어떤 때는 좀 유치하다 싶을 만큼 예수님을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원색적으로 표현해도 우리는 잘 알아먹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위의 단어가 갖는 함축된 의미인 ​‘양문’​ 곁의 ​‘은혜의 집’​에는 누가 모여 있습니까? 병자들이 모여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혜의 집에 와 있으면서도 은혜와 상반되는 것이 있는데 물이 동할 때 들어가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이 동할 때 재빨리 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물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물이 동할 때 재빨리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병자가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중에서 병자 중에서도 중풍병자를 예로 들었으며 ​왜 하필 38년 동안이나 된 중풍병자를 예로 들었을까요? ​이건 좀 비약이 지나친지는 모릅니다만 신명기 2장 14~15의 말씀을 봅니다.

​"가데스 바네아​" ​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여기서 ​38년​이라는 년수가 나옵니다. 이것과 오늘 본문인 ​38년 된 중풍병자 사이에 일맥 상통하는 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초입니다. 거기서 정탐꾼 열 둘을 보냈는데 그들이 정탐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무서운 적들이 있어 ​‘못 들어 갑니다라고 주장 하지만 정탐꾼 열 둘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가자고 우겨댑니다. 그러나 모두 백성들의 반대로 인하여 할 수 없이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약속대로 그 곳에 들어가지 아니한 너희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에 다 죽으리라" ​로 선언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의 율법을 받기 이전이었고 가네스 바네아 이후의 생활은 율법을 받고 38년 입니다. 그 ​38년이 여기에 왜 등장하느냐 ​하면 ​가나안 입국이라는 것이 은혜로 약속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혜라고 한 것은 ​그 땅이 내 힘으로 빼앗아 쟁취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상대방이 그 키가 9척이라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그들 앞에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 싸우나 마나 질 것이 뻔한데 무엇 때문에 죽으러 갑니까? 못 들어 갑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획득해야 할 결과들을 자기 손에 의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할 때 율법이라고 말하고 행위라고도 합니다.​ 율법은 어떤 법칙을 지키는 문제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얻어야 할 결과를 자신의 힘과 자신의 것으로 말미암아 얻어 가지는 방법론을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서 왜 그렇게 수 없이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를들어 ​‘기도’​ 하는 내용을 보면 무슨 응답을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기도의 힘이라고 합니다. ​그럼 기도는 누가 했습니까? ​자기가 ​열심히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라는 노력과 수고가 은연 중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구원과 생명도 자기 열심이 일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오해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의 사건이 바로 거기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것입니다. 분명히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 누구든지 이 못에 들어가면 병이 낫습니다. 그러나 들어갈 방법과 힘이 없는 것이 ​율법을 손에 든 모든 인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방법을 몰라서 구원을 못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을 힘도, 또한 무엇이 구원인지 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사실을 거듭 말하고자 세가지 병명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중풍병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될텐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병자 중 중풍병자를 등장시키십니다. ​다른 병에 비해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너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왜 그 모양이냐?’ ‘너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베데스다 못까지 뛰어가는데 있어서 나는 한 쪽 발로 뛰어가도 너보다 낫다’ ​그 싸움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들이기에 한 쪽 발로 뛸 수는 없습니다. 구르려고 해도 제대로 구르지도 못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데스다 못에 ​최초로 꼴찌로라도 들어가려던 것을 포기한 사람들 입니다.

왜 포기했습니까? 우리는 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난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어서라도 가려고 애를 씁니다​. ​들어가기에는 ​실력이 없다는 ​것이 뻔한 사실인데도 ​자신들이 정해 놓은 눈금까지는 ​갑니다. 그 눈금은 ​철학입니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종교들 ​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나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다. ​네가 나보다 공부를 잘 하니? 네가 나보다 잘 생겼니? 넌 지난 번 시험을 볼 때에도 컨닝을 하지 않았니?​ 그런 것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공격입니다. ​‘주여 저를 제일 먼저 저 못에 넣어 주시옵소서!’​ 하는 요구를 한 적이 없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를 물이 동하는 때에 못에 넣어 주시는 것으로 이 사건을 결말짓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은혜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주를 알게 하시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시려는 것이 이 사건의 가장 큰 핵심입니다. ​"느헤이야 3장1절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귀환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백성들과 귀족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다시 복구하기 시작합니다"

​맨 처음에 재건시킨 곳이 ​‘양문’​이었습니다. 제일 나중에 세운 성문은 ​’함밉갓’​ 문이 었습니다. ​‘밉갓’​의 의미는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상징적입니다. 최초의 문으로 ​‘은혜의 문’​을 건축하고 차차로 여러문을 복구한 다음 마지막으로 ​‘심판의 문’​을 재건한 것이었습니다. 아주 상징적이지 않습니까?

"율법으로 인하여 행위라는 것은 성취하는 자에게는 상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지는 것이 법칙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어떤 선한 결과를 위하여 주고자 하는 자의 마음대로 어떤 복을 선물로, 무상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게 베풀어도 공짜는 싫다고 벌 받으러 갑니다. 영원히 받아야 할 형벌을 너무 모릅니다. 아니면 똥배장입니까? 부릴 때를 가려가며 부려야 통하지만 그 곳은 잠시 스쳐가는 곳이 아닙니다. 좋은 말 할 때 따라 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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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friend | 2019/07/05 12:00 | 트랙백 | 덧글(0)

믿음으로 행한 헌신은 하나님의 양식

⁠유대인의 명절에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추수감사절입니다. ​성경적 표현으로는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이 되었을 때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왕을 굴복시키고 마지막으로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던 재앙의 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낸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의 시기는 이스라엘 달력으로 1월14일입니다. 거기서부터 50일이 되는 때가 오순절, 또는 맥추절, 즉 맥을 추수하는 절기로 칠칠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다음에는 ​수장절이 있는데 지금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풍성하게 은혜로 거둔 곡식을 추수하고  나서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세 절기를 지킬 때에는 성회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회로 모인다 함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스라엘 법규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규례가 적용됩니다.

즉, 성회로 모이는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이라는 단서가 꼭 붙어 있습니다. 레위기 23~26장 까지를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세 절기는 계절별로 절기를 삼았을 뿐이지 이 절기를 지키는 ​근본 원리는 안식일을 공통인수로 하여 절기화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안식일에 관한 설명을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만드시고 제 이레 ​되는 날 쉬셨기 때문에 너희도 쉬라고 하시며 그 계명을 설정하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 당시의 ​안식일은 오늘 날의 요일로 따지면 토요일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삼육두유’​를 드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 우유는 토요일에는 배달을 안 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고수하며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토요일이 안식일이므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우유가 배달이 안 됩니다. 싫으면 먹지 말라고 아주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자신이 있을까요? 율법을 지킨다는 자신과 자기네 제품이 우수하다는 자신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그렇게 지키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만들어 놓고서 그 다음부터는 아무 일도 안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 10절~18절까지 보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비를 내리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고, 지금도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시며 죽은 심령을 중생시키고 계십니다.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움직이십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엿새 동안 내가 일하고서 이레 되는 날에 내가 쉬었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어떤 법칙을 만드시는 일을 끝냈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간섭하고 보조하고 마무리 지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을 처음에 선포하실 때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창조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고 ​그의 창조는 완벽하여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한편의 메시지는 ​너희가 이 일에 어떤 노력과 수고로 얻을 수 없고 도움을 줄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을 근거로 하여 유월절, 오순절, 추수감사절을 크게 절기화 시킨 것은 ​인생을 애굽에서 구원 하시는 유월절과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 오순절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를 추수하시는 과정 안에서 기쁨과 규칙을 얽어서 예언을 규례화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잊어 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8월15일을 국경일로 정해 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반추하지 않게 됩니다. 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일을 지키지 않으면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지 않게 됩니다. 이 같이 ​경축일이나 추모일들을 기념일로 정해서 지키는 것은 잊기 쉬운 우리를 위해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지키게 하므로써 그때마다 이런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해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고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이이니라" 이것이 안식일 및 구약에 허락 되었던 모든 절기와 명절들에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자상하셨는가, 어떻게 충족시키시는가,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인가에 대한 실제적인 선물들을 각자의 손에 들고서 기뻐하는 날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을 은혜로 받고 그의 생애를 은혜로 받고 구원을 은혜로 받으며 천국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받아든 모든 은혜를 가지고서 마치 자기가 실력으로 이것들을 찾아내고 받아내고 획득한 것 같이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행한 모든 일은 하나님께 어떻게 됩니까? ​요한복음 4장31절~34를 보세요. 그가 피곤하여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 곁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은 그의 곤핍함을 육체적으로만 채우면 되는 줄 알고 먹을 것을 사러 모두가 동네에 들어 갔었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위에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럼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양식은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이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인 것입니다.

말라기 3장10절에도 ​"하나님의 양식에 대하여 나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십일조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성전세인 ​‘반세겔’​을 알아 보겠습니다. 반세겔은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성전세를 드려야 합니다. ​"이 반세겔은 각자 자기 생명의 값을 대신하여 드리는 ‘속전’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나 부자나 다 반세겔을 내야 합니다. ​즉, 구원에 있어서 ​속전이신 예수님으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예표인 것입니다​. ​반세겔은 구원주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단서에 ​"한 세겔은(20겔라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가 반세겔이므로 반으로 나누면 ​"십겔라라" ​가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장13~14)

그래서 ​"반세겔 은동전 한개 안에는 십겔라라의 가치와 숫자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일’을 드리므로 나머지의 숫자도 다 드려진 ​것입니다. 반세겔이나 십분의 일도 대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자 한사람을 드렸는데 그 장자 안에 나머지 가족들이 드려진 것으로 여겨 주시는 제도인 것입니다. 모든 제도는 ​대표성을 가진 한분의 예수님이 드려지므로 구원받은 모든 인생들이 드려지는 것입니다.

​십이란 숫자만 있으면 수 많은 숫자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끝없는 수를 나타낼 때 십이란 숫자를 사용합니다. 즉, ​예수님 한분으로 수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숫자로 예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한분이 대신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것을 믿는 모든 영혼들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죄의 대가로 우리의 생명을 대신하여 예수님이 속전으로 드려지므로, 죄사함을 받은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속전을 한세겔이 아니라 반세겔이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의 반세겔은 우리 이방인들의 구원이고요, 또 하나의 반세겔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세겔이 되는 것입니다. ​굳이 단서에 한세겔은 20겔라라라고 ​기록해 놓으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와 유대인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에 나오는 ​"양식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창고에 채워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는 모든일은 하나님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믿음을 위해 절기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절기는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 아멘 -    ​  

 

by X-friend | 2019/06/21 12:0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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