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실 때 삼손은 어떤 존재일까요?

 

삼손은 위인이거나 영웅이라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의 일생을 통하여 보여줄 메시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중요할 뿐입니다.

삼손 얘기 중 가장 재미있는 내용은 들릴라라는 여자에 미혹되어 머리를 깎기고 잡혀가서 두 눈이 뽑히고 나중에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려서 거기에 참석한 모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었다는 삼손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문제는 삼손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건으로 보이는 16장을 보시면 납득이 가실 것입니다. 거기에서 들릴라를 만났는데 들릴라가 ‘무엇이 당신 힘의 근원입니까?’하고 꼬리를 치며 자꾸만 물어 옵니다. 16장 17절을 보면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들릴라에게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 하였나니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이 말이 충격적입니다. 왜 충격적인 줄 아세요. 생각해 보세요. 삼손은 지금까지 자기가 나실인으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태 것 그가 나실인으로써 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금기사항을 깨놓고도 나실인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만 안 자르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게 삼손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입니다.


그는 나실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으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입니다.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금기사항인데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딤나에 내려가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반하여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아내를 취합니다. 그가 그걸 처음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들릴라는 벌써 두 번째입니다.


그는 머리만 안 자르면 스스로를 나실인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문제에 있어서도 삼손과 같이 재미있는 상징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 교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는게 십일조인 것 같습니다.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앙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측정법이 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철야기도를 하고 그걸로 여러분의 전 신앙생활에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철야기도와 십일조를 빼놓고도 신앙을 증명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 거듭남과 변화 장성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성화의 삶 등 나와 여러분이 철야기도와 십일조 밖에 들어 낸 것이 없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입니다.


보통 사사의 등장과 그의 죽음을 마무리할 때 사사기가 쓰는 일반적인 평가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몇 년을 이스라엘 사자로 지냈고 그가 사사로 있을 ‘몇 년 동안 이스라엘 태평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 하였더라 그가 있는 동안 태평 하였더라’ 그것이 모든 사사에 있어서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냈지 그는 이스라엘 구한 적도 없고 태평을 준  적도 없습니다. 사사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태평을 주기는커녕 여자 문제로 개인적 일로 일만 저지른 사람이 였습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포도원에 이룰 때 사자를 만납니다. 삼손은 가차 없이 그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 죽일 뿐만 아니라 다시 돌아가 사자의 주검을 보고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 꿀을 먹고 자기 부모에게 까지 먹게 합니다.


사자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정한 짐승은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사자는 굽이 갈라지지도 않았고 새김질도 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1장 이하에 보면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거나 보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부정한 짐승을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자를 찢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부정한 사자의 죽검을 보고 그 몸에 있는 꿀까지 먹고 자기 부모에게 까지 먹게 합니다.


사자가 왜 부정합니까? 사자는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무엇라고 합니까? 자기 주먹을 믿고 산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힘을 믿고 자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식자랑 물질자랑 자기 지위를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사자가 약한 짐승을 잡아먹듯이 세상을 보세요. 세상은 힘이 있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힘’있는 기업만 살아남지 않습니까?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힘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힘’겨루기를 합니다. 약한 자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업이든 국가든 약하면 잡아먹히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나라와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이런 세상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체질과 사상을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수영을 배워야 물 위에서 수영을 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영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성경은 사자의 특성을 통하여 세상의 모습과 우리의 죄악 된 삶의 모습을 비유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힘없이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힘을 가지고 약한 자를 도우며 그것으로 관용을 베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삶은 백성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세상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나 개인을 위해 ‘힘’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힘의 상징이요 생육강식의 상징인 사자를 삼손이 찢어 죽였다는 것은 강한 자를 이긴 것입니다. 얼마나 삼손이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세상 경쟁에서 이기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는 대목입니다. 삼손이 죽인 사자의 몸에 있는 꿀을 먹었다는 것은 세상 경쟁에서 이긴 승리감과 자랑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 것을 부모에게 주었으니 삼손은 이름만 나실인이지 세상 강자로 살아가는 죄인 중에 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실인이 갖추어야 할 관용과 사랑과 희생의 모습은 찾아 볼래야 볼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앞부분에다 사자 이야기를 하셨겠어요. 삼손의 삶을 비유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한번 보세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삼손은 블레셋과 싸우는데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모두 다 개인적으로 싸운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손은 개인적으로 싸우지 아스라엘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첫 싸움이 시작되는 것은 딤나로 내려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 때문에 수수께끼 문제로 삼십 명을 때려 죽이는 사건이고 그 다음에 여우 꼬리를 붙잡아서 불붙이는 사건 역시 다 여인 때문에 생깁니다. 개인적인 원한입니다.


28절을 보면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밴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죽음까지도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로서가 아니고 개인적입니다. 자기 두 눈을 뺀 블레셋에게 원수를 갚게 힘을 구합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이 이 문제와 비교를 해 볼 때 하나도 오리발을 낼게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도 내용을 보세요. 어떤가 삼손 사사의 사건이 가장 무서운 교훈일지도 모릅니다. 참 무서운 생각이 드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나실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by X-friend | 2010/05/20 12:2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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