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에 창문도 없고 오직 문하나

 

성경에 있어서 성막 얘기는 그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성막 얘기는 출애굽기에만 13장이 나오고, 레위기 18장, 민수기 13장, 신명기 2장과 히브리서 4장 5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신구약 성경이 모두 118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막 얘기가 50장에 걸쳐서 나온다는 얘기는 성경 전체의 무려 1/24가 넘는 곳에서 성막 얘기가 거론된다는 뜻입니다. 기록된 분량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막 설계 과정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만에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막의 설계에 무려 40일식이나 할애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성경에서 성막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천지 창조에도 단6일 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무려 40일이 할애되어야만 했던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막은 우리에게 예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막을 보면 예수가 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보이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보이고 그를 통해 구원 얻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보입니다.


성막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성소에 창이 없습니다. 어떤 건물을 지으면서 창을 만들지 않았다면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울타리 동편에 있는 문도 그렇습니다. 가로 세로가 100규빗(45.6m)과 50규빗(22.8m)인 작지 않은 규모의 성막에 굳이 문을 하나만 만든 것도 그렇고 또 그 문의 크기도 울타리의 크기에 비해서 너무 크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지으셔야 하는지 의문이 가는 내용이 한둘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막뿐만 아니라 노아의 방주도 창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천장에 창문 하나만 뚫려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도 성막도 구원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문은 있어도 창문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절대로 세상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죄에 물든 세상 것을 삶의 목적으로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방주 안에서도 다른 곳은 볼 수 없습니다. 하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눅 17:25~33에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때 롯의 가족들이 성 밖으로 빠져 나왔지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뭘’ 시사하는 것입니까?

롯의 아내는 세상 것에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므로 구원 받기 전 탈락하고만 것입니다.

창 19:5~11절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에 가장 타락한 것은 性이였습니다. 그 당시 동성연애가 극심하였습니다. 같은 동성끼리는 생명인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죄악 중에 죄악입니다.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다는데 소금이 어떤 역할을 합니까? 부패를 방지 하여 썩지 못하게 합니다. 롯의 아내는 썩지 않는 영존체가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금기둥이 무엇을 의미 합니까? 기둥이란 자기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말뚝을 박은 것입니다. 어디다가 말뚝을 박았느냐구요? 지옥에다 박은 것입니다. 그 의미는 자유를 잃어  버린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자유한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으로 저주 속에서 영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하는 겁니다.


자 그럼 성막에 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성막에 크기에 비해 문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구원은 한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7~9)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만이 구원이 있지 절대로 다른 종교나 내 능력 내 수고 내 열심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문이 하나인 것 같이 구원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온 인류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울타리에 비해 문이 크게 설계된 것은 구원은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인류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의 큰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8절에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린다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입니다. 코앞에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는 죄를 따라 사는 것이 편합니다. 하지만 죄는 멸망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멸망의 문이 크고 그 길이 넓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의인은 의롭게 사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이 넓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은 의롭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일찌라도 지금까지 살았던 죄의 습성 때문에 신앙의 길이 좁고 험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험해 보셨겠지만 성령 충만 할 때 그 험난한 길이 험난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치기 때문에 험난한 길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충만함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유혹과 내속에 탐심이 살아나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문에는 세마포가 쳐저 있습니다. 이 포장은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것입니다. 문의 아름다운 색깔은 문의 목적이 써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 문이 어떤 분인지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색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왕의 직분은 백성을 인도하며 보호하는 역할입니다. 홍색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청색은 천국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백색은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청색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색은 왕으로서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 백색처럼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백성의 죄의 대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홍색의 의미처럼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by X-friend | 2010/06/18 12:05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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