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안에도 부정한 짐승이...

이번에는 레위기 11장 4-7절까지의 말씀 속에 부정한 짐승은 누구인가 찾아보겠습니다.

 

약대는 되새김질도하고 굽도 있습니다. 단, 굽이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약대로 비유한 신앙이란 어떤 것이지 같이 이해하여 보겠습니다.

 

되새김질하는 것을 보아서는 말씀이 있어 묵상도 하고 은혜 받으며 살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말씀이 있다 보니 죄와 떨어져 살고자 합니다. 상당한 수준의 신앙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굽이 갈라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적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하여 고집스럽게 자기 신앙만 주장하며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이란 내가 아무리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내 형제 신앙이 어느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한 마리 양을 기다리듯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소리가 나면 안 됩니다. 율법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상 6:7절에서 말씀하기는 성전을 건축할 때에 돌은 채석장에서 다듬은 뒤에 가져 오게 하였고 성전에서는 망치나 정, 그 밖의 쇠연장으로 작업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당 안에서 봉사하고 헌신, 교제하는 것은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이나 봉사할 때 소리가 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양보와 상호간 이해가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말씀이 전부인 것처럼 신앙 생활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런 신앙은 교회 안에서 소리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가장 근본은 겸손입니다. 그래서 굽이 갈라져 있는 짐승처럼 좌로나 우로나 살펴보면서 맞추어 갈 때가 있고 기다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람 발의 역할을 생각해보자고요. 발가락은 균형을 잡아 주기도 하고 때에 따라 방향을 바꿀 때 큰 역할을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뜻도 있지만 고집스런 자기 생각을 버리고 말씀 따라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산다는 뜻도 됩니다. 굽이 갈라져있는 짐승의 갈라진 기능은 사람의 발가락 기능과 비슷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람 발가락으로 비교해본 것입니다.


토끼는, 실은 되새김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입을 항상 움직이고 있어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보일뿐입니다. 굽도 없고 굽이 없다보니 역시 갈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 출석은 하지만, 좋은 말씀을 통하여 그저 반듯하고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하여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되새김질 하듯 그 말씀에 지배받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보이듯 말씀 속에 사는 것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기복신앙입니다.


구원보다는 병고치고 부자 되고 출세하려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받으면 나의 가치관이 변하고 시각이 변하고 사고가 변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신앙이 성숙되어 인격이 변하여 성화되어야 하지만, 축복의 말씀이 보이는 물질의 복으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아니라 부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죄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토끼는 굽이 없다보니 발이 땅에 직접 닿습니다. 지난번 말씀 드렸듯이 땅은 죄와 저주를 상징합니다. 발은 행함을 나타내고요, 다시 말씀드리면 죄를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토끼 같은 삶은 말씀이 없다보니 삶의 목적이 이 세상 물질과 명예가 전부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무슨 짓도 가리지 않고 죄를 지으면서 얻습니다. 죄 속에 사는 것입니다.


돼지는 되새김질은 하지 않습니다. 즉,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는데 믿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굽이 있고 굽도 갈라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쪽발입니다. 굽이 있고 굽이 갈라져 있다는 것은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향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선행으로 착한 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목숨을 걸고 합니다. 선행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 25:31 ~ 46절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 일어날 상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자이신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모든 민족이 그 앞에 모일 것이 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 하듯이 의로운 자와 불신자를 구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양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의로운 자이고 염소는 불신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의로운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는데 너희들이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며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칭찬을 하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의인들이 내가 언제 하였는냐고 반문 합니다. 그러니까 임금이신 주님께서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 의인들의 표현은 겸손을 떨기 위한 내숭이 아닙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이 고백이 맞습니다. 갈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럼 선행을 누가 한 것입니까?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도 우리는 포도나무에 가지라고 합니다. 가지에 열매가 달려있는데 이 열매는 누가 맺은 것입니까?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은 것이지 가지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의인들이 모른다는 표현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될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이 지극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하신 것도 너희에게 챙겨주시겠다는 사랑이십니다. 이게 왠 떡입니까? 그냥 감사의 말 밖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왼편에 있던 자들에게 책망을 하시면서 마귀와 함께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말씀하시니까 그들이 반발하면서 자기들이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 치 아니 하였나이까?


자기들이 분명 선행을 하였다고 변명 합니다. 그런데 왕이신 주님께서 뻥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의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똑같이 하십니다.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면서 저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라고 심판 하십니다.

 

저들은 분명 작은 자 뿐만 아니라 더 큰 선행을 많이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 따라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여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 선행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선행 한 것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 돼지로 비유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말씀도 사랑도 없이 자기가 열심히 선행을 한 것입니다. 죄인이 선행을 하였다고 죄와 잠시 떨어져 살았다고 원죄와 자범죄가 해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를 해결 받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by X-friend | 2008/08/22 16:07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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